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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아웃된 얼굴이지만 내 눈엔 주인공인 단역들
▲ 영화와 현실의 경계 <카트> 포커스아웃된 얼굴이지만 내 눈엔 주인공인 단역들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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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만에 남편과 단 둘이 영화 볼 시간이 생겼다. 그것도 평일 조조. 몇 주 동안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강행군이었던 우리 부부는 영화는 무슨 영화냐며 어디 가서 밀린 잠이나 잘까했다. 하지만 세 아이를 낳아 기른 지난 오년 동안 단 둘이 데이트 한 번 못하고 지낸 게 괜히 억울해서 극장을 찾았다. 더구나 영화 <카트>가 개봉되었으니 짬을 내서라도 극장 나들이를 해야 했다.

화요일(18일) 오전 9시 50분 상영임에도 객석이 반 이상 찼다. 단체 관람을 온 중장년 여성, 쉽게 말해 아줌마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 자리는 그 아줌마들 사이였다.

아줌마들 사이에서 본 아줌마들의 영화

주부 6년 차, 아이 셋 낳고 두 번 이사를 하며 30대 후반 아줌마가 되었다. 오랜만에 하는 남편과의 데이트라지만 첫째 유치원 보내고, 다른 두 아이 아침 먹이고 간식까지 챙기느라 겨우 세수만 하고 손에 잡히는 점퍼 하나 대충 걸치고 나왔다.  

애 셋 낳은 후유증으로 시도 때도 없이 시린 무릎을 떨며 영화를 봤다. 영화에 대한 정보나 리뷰는 이미 많은 곳에서 보도됐으니 생략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후기를 육아일기장에 남겨본다.

영화가 시작되고 마트의 일상이 나오자 단체관람을 온 아줌마들이 즉각적인 반응을 했다. 내겐 생소한 단어 '까대기'같은 단어들에 아줌마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마트와 집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에 자기 일처럼 호응했다. 스크린과 객석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험이었다.

영화 속 낯익은 얼굴들

그러다 영화 속에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과 극단 선배, 동기들이 조연과 단역으로 출연했다. 반가웠고 그동안 연락 한 통 못한 무심함에 미안했다. 결혼 후 아이들 낳고 키우느라 극장 구경은커녕 최신 영화, 공연 뉴스조차 챙기지 못하고 살았다. 친구들 모임은 물론 동창회도 가지 못했으니 서로의 소식도 모른 채 6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출산과 육아가 경력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마저 단절시켰다. 자의 반 타의 반 단절된 시간을 이젠 좀 이어붙일까 할 때, 스크린을 통해 마주한 얼굴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오랫만에 보는 얼굴 응원할께
▲ 반갑다 친구야 오랫만에 보는 얼굴 응원할께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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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꿈으로 부푼 이십대 초반을 함께 달렸던 동기들의 얼굴이, 그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선배들의 얼굴이 소시민으로 분하여 영화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20대 그때에서 십 몇 년을 훌쩍 넘겨 주름진 얼굴로 화려한 의상과 분장 없이 그냥 아줌마, 아저씨를 연기하는 그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연기하는 듯했다.

'반찬값이나 벌자고'가 아닌 당장 급한 생활비 벌러 나온 영화 속 마트 계약직 아줌마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단역 오디션을 봤을 수도 있는 동기들이, 나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세상의 주인공이었던 20대

꿈만으로 밤새 하늘을 날았던 20대에 세상의 주인공은 나였다. 그러나 30대가 되고 아이들을 키우며 40대를 준비하는 지금, 내 꿈보다는 아이들의 진학과 생활비, 전세금을 고민하는 소시민, 아줌마로 살고 있다.

모두가 배우
▲ 단역이든 주연이든 모두가 배우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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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뜨겁던 그 시절엔 꿈만으로 벅차올라 거칠 것 없었다. 그 꿈에 가려 보지 못했던 세상도 많았다. 사느라 꿈이 작아지거나 사라져버린 지금,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자식 키우듯 살피기도 한다. 마트에서 필요한 것만 사오기 바빴던 날들에서,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치는 아줌마 직원들의 지친 얼굴을 나 자신처럼 살피는 날들. 그 사이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영화에서 눈에 띄지 않는 역을 맡아 속상하기도 했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여러 삶의 얼굴을 보여줘서 고맙기도 했다. 비록 조연, 단역이지만 계속 꿈을 그려가고 있구나하며 안도가 되기도 했다. 요즘 변두리 동네 마을극단에서 글을 쓰는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꿈도 나이를 먹더라

함께 하는 이가 있기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다 함께 하는 이가 있기에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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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의 두 돌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와 이젠 세 아이들이 내 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 주요 일은 2, 4, 6세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공연 한 편 못 보며 나의 꿈과 단절된 시간을 살았다. 조금씩 나아지겠지만 앞으로 몇 년은 더 육아에 매달려 살아야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생각나는 꿈들을 외면 할 수 없어, 동네 엄마들과 마을극단을 만들어 꼼지락거린 올 한해. 성과도 있었지만 답답한 벽 앞에 주저앉기도 했다.

소위 잘 나가는 동료들의 소식을 듣는 날엔 내 자신이 초라해졌고, 한때 푸르게 빛나던 내 꿈이 변두리 동네 골목으로 떨어진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 과거의 박수를 잊지 못해 소박하지만 집밥처럼 정성으로 짓고 있는 지금의 꿈을 외면해버릴까 고심한 밤도 있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다시 젊은 날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함께 가보자 신나게
▲ 내 카트에 담긴 꿈들 함께 가보자 신나게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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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셋이나 데리고 걸어가면서도 누군가 뒤에서 '아줌마'하고 부르면 내가 아닌 줄 아는 철없는 30대 후반의 아줌마인 나. 이젠 스스로 아줌마가 되어, 역시 아줌마가 된 스크린 속 얼굴들에게 오랜만에 안부와 응원을 보낸다. 얼굴에 주름이지듯 꿈도 나이를 먹어 닳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걸 인정하며.

소시민의 삶을 사는 게 단순히 무뎌지고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나와 가족, 동료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란 걸, '더 마트 노동조합' 언니들과 그들을 연기한 '배우'를 보며 다시 되새긴다.

지난날엔 꿈을 이루는 삶과 소시민의 삶은 다른 길 위에 있는 줄 알았다. 변하는 게 당연한 거고, 그러면서도 변치않는 게 고맙다는 걸 이제야 안다. 세 아이의 엄마로 변두리 동네에서 작은 이야기를 짓지만 여전한 내 꿈이기에, 그 꿈이 예전처럼 대단하지 않기에 더더욱 묵묵히 간다. 결국엔 같은 길이니까. 그 길도 세상이니까.

내 청춘의 마왕을 보내며 내 청춘의 막차 같은 유희열이 쓴 <취한밤>을 듣고 또 들으며 아줌마의 일기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우린 변해가고
시간은 멋대로 흐르고 
모두들 잘살고 있나요 괜찮은 건가요
오래 품어왔던 꿈들
내 것이 아니었나 봐요 다 그렇잖아요
그게 참 그리웠나 봐요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주던 사람들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해요
우리 아프지만 마요"



태그:#영화 카트,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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