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한국 소비자의 소비심리가 세계 60개국 중 최하위권인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11월 글로벌 여론조사업체 닐슨에 따르면, 국내 응답자의 87%는 향후 1년간 일자리 전망에 대해 나쁘거나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한국 경제가 불황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87%가 '그렇다', 1년 안에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과반수(59%)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경제 불황에는 립스틱이 많이 팔린다거나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등의 속설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경제에는 왜 이렇게 속설이 많은 것일까? 물론 그만큼 사람들이 경제에 관심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런 속설들은 맞든 아니든 사람들의 행동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행동한다는 식의 전제 말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들의 행동에 일정한 합리성이 있다는 뜻이다.
경기 불황 시, 위험을 최소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돈 버는 요령 따위는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호황일 때는 서로 정보를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황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까?'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되니 자연히 이런저런 속설들도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런 속설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립스틱 경제학>의 몇몇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짧을수록 돈 되는 미니스커트의 비밀경기가 불황일수록 사람들은 불안해지고, 불안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다. 이런 속설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불황일수록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이다.
우리나라에서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03년부터인데, 이는 국내 경기가 급속히 악화된 시점과 대략 비슷하다. 기업들은 경기가 나쁠수록 비용을 절약하고자 노력하기 마련이므로, 옷감이 적게 드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는 게 아닐까?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에서는 옷감 절약을 위해 치마를 짧게 입으라는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또 불황일수록 디자이너나 의류 회사들은 소비자들의 눈에 더 잘 띄기 위해 애쓰므로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이 유행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불황일수록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미니스커트의 유행과 경기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불황일수록 직물 회사들은 원단 재고로 물류비를 낭비하느니 옷감이 많이 드는 롱스커트를 유행시켜 원단 소비를 늘리려 하기 때문에 롱스커트가 유행한다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호황이라면 같은 양의 원단으로 많은 옷을, 즉 미니스커트를 만드는 것이 나으니 호황에 도리어 미니스커트가 유행해야 할 것이다. 불황이 아닌 호황일수록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주장은 소비자의 심리적인 측면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호황이 거듭되면 아무래도 밝은 사회적 분위기에 걸맞게 스커트의 길이가 짧아질 가능성이 크다. 밝은 색상에 발랄한 패션이 유행하면 자연스럽게 미니스커트의 매출 증가로 연결된다. 반면 불경기에는 우울한 사회 분위기 탓에 무겁고 점잖은 옷차림이 선호된다.
패션업계 종사자의 말을 빌리자면 미니스커트의 유행 주기가 약 20년 정도인데, 우연히 그 주기가 호경기와 만나기도 하고 불경기와 만나기도 한단다. 패션업체들은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변화를 준 스타일로 유행을 반복하는 판매 전략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니스커트가 20년 주기로 유행한다고 한다.
콘돔 사서 퇴근하는 정 과장의 속내불황일수록 콘돔이 많이 팔린다는 속설이 있다. 그 이유를 굳이 말로 설명해야 할까? 불황일수록 야한 속옷이 많이 팔린다는 것과 같은 이치로, 불황일수록 외출을 줄이고 애인이나 배우자와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에 콘돔 사용량이 증가한다고 한다. 또 기혼 부부들의 경우, 양육비 부담이 커지므로 출산을 늦추기 때문에 콘돔 판매량이 증가하지 않을까?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조사를 인용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불경기가 시작된 2008년 하반기에 콘돔 판매량이 상반기에 비해 19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나라 콘돔업체들의 매출액 증가는 경기 불황 때문이 아니라 콘돔의 해외 수출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세계 콘돔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점유율 1위라고 한다. 콘돔 시장은 공공 시장과 상용 시장으로 구분되는데, 공공 시장의 규모는 약 20억 개로 한국 기업들이 30퍼센트 이상을 공급함으로써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다.
국내에서는 매년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콘돔 판매량이 증가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콘돔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다. 편의점업체 GS25가 지난 3년간 콘돔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매년 12년 25일에 콘돔이 가장 많이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불황일수록 콘돔이 많이 팔린다는 속설에 대해 별로 그렇지 않다는 답변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녀의 입술 색으로 경제를 읽는다경기 불황일 때, 저가임에도 소비자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품이 잘 판매되는 현상을 '립스틱 효과' 라고 한다. 이는 립스틱만 발라도 분위기를 바꾸는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 경제상황에 적용된 것이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눈길을 끄는 방법으로 저렴한 가격을 첫 번째로, 제품색의 차별화를 두 번째로 꼽는다. 그렇다면 정말로 불경기일수록 빨간 립스틱이 더 잘 팔릴까?
2008년 립스틱 전체 매출은 전년 대비 14퍼센트 성장했고, 유독 빨간 립스틱의 매출이 77퍼센트나 늘었다고 한다.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외환위기 때도 나타났다고 한다. 불황기의 답답하고 우울한 심리를 화려한 색상으로 전환해 보고자 하는 '쇼핑 효과'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보다는 개성이 강조되고 화려함을 선호하는 취향에서 비롯된 현상은 아닐까? 여자라면 하나씩 갖고 있어야 할 아이템이라며 광고하는 화장품 업체의 마케팅으로 구매하게 되는 심리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빨간 립스틱이 불황이 아닌 경제 회복을 의미한다. 최근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일본의 경기 회복,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디플레이션과 엔고(円高) 탈출을 위해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아베 정권의 정책) 덕분에 일본 최대 화장품 기업인 시세이도의 빨간 립스틱 매출이 급증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 경제 전망이 비관적일 때에는 옅은 누드톤 색깔이 유행했고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가 클 때는 빨간 립스틱이 유행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급격한 경제 회복을 이루었던 1950년대에는 빨간 립스틱의 인기가 높았다.
도대체 누가 옳다는 것인지?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이야기다. 호황일 때 속설들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호황일 때는 아무도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불황이 되니까 속설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비단 경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많은 경제 속설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이런저런 속설들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세상을 보는 바른 지혜와 안목을 가지라는 것이다.
불황일수록 경제 서적들이 잘 팔린다는 속설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왜 경제가 어려운지 알고 싶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무언가 긍정적이고 희망과 용기는 주는 대답을 듣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경제가 어려운 이유가 보통 사람들에게 있지 않은데, 경제 서적을 많이 읽는다 한들 어떻게 경제가 나아지겠는가? 하지만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덧붙이는 글 | 립스틱 경제학 | 경제교육연구회 (지은이) | 위즈덤하우스 | 2010-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