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전공이 중국이었다. 중국 하면 역시 그 광활한 영토와 인구만큼 볼 것도 먹을 것도 느낄 것도 무궁무진하다. 또 수 천 년의 역사에서 수많은 사건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가는 화두는 무엇일까? 단연 '대장정'이었다. 아무래도 현대 중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단순히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당연히 대장정에 관한 수업을 들었고 관련된 리포트를 작성한 적이 있다. 장장 2년 동안 1만 2500 km의 길을 돌파한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짧은 리포트로 담아낼 수 있었을까 암담했지만, 그 배경과 경과, 결과와 의미를 알기 쉽게 요약하느냐고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함과 동시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대장정을 떠난 이들이 신었던 짚신의 개수가 몇 개인지 조사한 사람? 도중에 음식은 어떻게 조달했는지 조사한 사람? 이런 기본적인 사항들을 조사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0점 처리합니다."필자에게 대장정은 현대 중국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를 바꾼 사건임과 동시에, 필자가 역사를 대하는 눈을 바꾸게 한 사건이었다. 그런 대장정을 오랜만에 다시 생각나게 해준 책이 출간 되었다.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책과함께). 필자가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책의 주제와 소재가 바로 그 대장정이기 때문이다.
새로울 것 없는 '대장정' 기획저자는 의외로 중국 전문가가 아닌 여행 전문가이다. 물론 중국 여행을 하며 역사와 문화를 다큐멘터리로 그려내는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대장정을 논하기에는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시중에 대장정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지 않다. 몇몇 개만 들어보자면, 필자가 소싯적에 많이 참고 했던 웨이웨이의 <대장정>(보리), 해리슨 E. 솔즈베리의 <대장정>(범우사)가 있고 우리 나라 저서로는 손호철의 <레드 로드>(이매진)가 있다.
위의 책 중 솔즈베리의 <대장정>과 손호철의 <레드 로드>는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처럼 대장정 코스를 답사하면서 대장정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기획이라는 뜻이다. 필자의 생각도 그렇다. 저자는 왜 새로울 것이 없는 답사를 하고 책으로까지 엮어 냈을까?
여기서 대장정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온전히 그 내용 만을 원한다면 웨이웨이의 <대장정>을 보면 그만이다. 친절하게 그림과 함께 더 없이 꼼꼼하고 치열한 당시 상황 재연을 접할 수 있다. 반면 이 책은 엄연히 여행기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답사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80년 전 대장정의 내용과 의미를 전해주어야 한다. 점점 이 두 서술 사이에서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거시적인 서술이 아닌 미시적인 접근을 바랐는데...저자는 답사 인원들의 실명과 사진을 보여주며 생동감을 부여하려 한다. 먼 길을 함께 한 이들에 대한 감사의 차원도 있을 테고 결코 혼자 한 여행이 아님에도 타이틀은 저자 혼자이기 때문에서 오는 어떤 의무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장정의 무게감이 퇴색되기 마련이다. 즉, 80년 전의 대장정에 몰입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답사 과정과 과거의 대장정 모두에게 신경을 쓰려다 보니 오히려 괴리감이 커지는 걸 느낀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바랐던 점은 대장정의 거시적인 서술이 아니라 미시적인 접근이었다. 아무래도 답사 여행을 골자로 하는 기획이다 보니, 대장정 당시의 출전자들 마음을 헤아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라고 할까.
도대체 어떻게 그 시대에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먼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식량은 어떻게 조달했고 잠은 어디서 잤으며 제대로 된 신발이나 옷이 없었을 텐데 추운 날에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가 하는 사소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 말이다. 동일한 코스로 답사를 간다고 하면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의 오래된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 하지만 역시 그러지 않았다.
아쉬운 것이 많은 책저자는 80년 전 중국의 대장정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꼭 음미해야 할 주제라고 말한다. 그러며 중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대장정 답사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고전 몇 구절을 따다가 자신의 주장을 포장하거나 자극적인 화제를 가지고 중국을 이야기하는 중국 인문학에 대해 아쉬워하며, 자신의 기획은 다른 차원에 있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저자의 말은 맞지 않다. 이 책 또한 자극적인 화제인 건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중국 고전 몇 구절을 따다가 포장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기도 아닌 것이 인문학 책도 아닌 것이, 여행이라는 기획물에 이미 나와 있는 대장정을 포함한 중국 현대사를 간략하게 짚고 넘어 가는 방식. 물론 거기에는 당시 대장정에 참여 했던 사람들의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궁금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학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은 책의 기획 의도에 있다. 아무래도 대장정 만을 다루기엔 어떤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큰 의미의 대장정'을 조망해야 한다는 기획 하에 대장정의 앞뒤로 1927년 장제스의 4·12 쿠데타와 장쉐량의 시안사변을 배치했다. 그러고 나서 저자는 글을 마치면서 세월호 침몰과 장제스의 실패를 언급한다.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은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법규가 국민의 이익보다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익에 맞춰 해석되고 운용되었다.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또는 부하에게 아니면 국민에게 책임을 미루었다." (본문 중에서)이렇게 저자는 대장정을 중국 현대사로 중국 현대사를 다시 현재 대한민국과 대비 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굳이 세월호 침몰을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 또 거기에 장제스의 중화민국 얘기를 넣어야 했을까, 왜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는 답사에서 그치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을까.
중국에 대한, 그것도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라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선택한 이 책. 오랜만에 대장정을 접하게 되었다는 점, 필자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 등은 진심으로 고맙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는 지라 책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다만 대장정에 대해, 중국 현대사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라면 큰 무리 없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읽는 재미 또한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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