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5시.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저녁 먹기 전 시간. 등교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때도 제법 바쁘다. 내일 준비물을 사러 오는 아이들 때문이다. 문방구 필수 아이템인 불량 식품을 사러 오는 아이들까지 있어 정신이 없다. 게다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온 장바구니를 멘 엄마들까지 합세해 좁은 문방구는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하다.
어김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야~ 그걸 왜 사? 쓸데없는 거 사지 마!"새로 나온 카드를 사려는 아이를 향한 엄마의 잔소리였다. 순간 난 얼음. 좀 과장을 보태자면 몸의 온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쓸데없는'이라니! 그 순간 나는 쓸데없는 거나 파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날은 장사하기가 더 어려웠다.
"쓸데없는 거 사지 마!"
사실, 장사하다 보면 별소리를 다 듣고, 별 손님을 다 만난다.
"왜 이렇게 비싸냐? 이거 말고 다른 디자인은 없느냐? 전엔 깎아줬는데 좀 깎아주면 안 되느냐...." 이런 경우는 대화로 가능하다. 손님이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해 주면 된다. 그러면 대부분 수긍하는 편이다. 하지만 '쓸데없는'이라는 경우란... 권투에서 한 라운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명치에 강한 펀치를 맞은 느낌이랄까. 휴~ 맥이 빠지고, 다리가 풀린다.
내가 그런 소리나 들으려고 장사를 시작했나? 그런 대접 받으려고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나? 난 그래도 열심히 장사하려 했는데... 난 아이들한테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고, 좋은 물건을 가져다 놓으려 했는데... 그것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쓸데없는'이라니.
이렇게 나를 케이오 시키는 단어는 '쓸데없는' 말고 또 있다. 자주 내 귀에 들린다. '필요없는 것, 그딴 것, 안 좋은 것, 몸에 안 좋은 것....' 못 듣거나 자체 필터링이 되어 안 들렸으면 좋으련만. 왜 그럴 때만 '소머즈'가 되어 큰 볼륨으로 다 들리는지.
충분히 부모 입장에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애 키우는 입장이라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 더 필요한 것을 사주는 것이 당연. 그렇지만 한 번 어릴 때를 생각해 보자.
다 '그딴 거' 사보지 않았나. 불량식품 다들 먹어봤고,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도 많이 사 봤고, 다 똑같아 보이는 딱지, 카드도 많이 모으지 않았나. 주위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엄마가 아무리 쓸데없는 거라 말해도, 아이 귀엔 들리지 않는다. 아이에겐 그 장난감이 어떤 물건보다 쓸모 있는 거니까.
"장사는 쉬운 게 아니야"
장사한 지 이제 4개월 되었다. 이젠 좀 장사에 적응되었다고 생각할 때, 이런 소리를 듣거나 진상 손님을 만나면 회의가 든다. 진이 빠진다.
'휴~ 장사가 역시 힘드네. 난 장사 체질은 아닌가 보다.' 몸무게도 거의 10kg가 빠졌다. 두 눈에는 항상 다크 서클을 달고 다닌다. 마치 프로야구 선수 눈 밑의 검은 테이프처럼. 사실 몸이 힘든 것보다 더 힘든 건 정신적으로 힘든 것이었다. 자연히 짜증도 늘었고, 손님들한테 욕도 많이 한다(물론 뒷담화).
한 번은 가게에 과자를 납품하는 아줌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무심코 어려움을 토로했다. 30년 넘게 이쪽 일을 하시는 아줌마는 "장사는 쉬운 게 아니야! 오장육부 다 끄집어내서 하는 게 장사여"라고 말한다. 모든 걸 다 초월하신 듯한 말이었다.
갑자기 옛날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여행스케치, <산다는 건 다 그런게 아니겠니>)아줌마의 말과 노랫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산다는 건 다 그런 거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어떻게 살 수 있나. 지금 난 서비스업을 하고 있다. 서비스업이 원래 감정노동이라지 않나. 나보다 더 힘들게 돈 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나. 장사란 게 그런 것 같다. 아니, 사는 게 그런 것 아닐까. 힘든 일 있으면 기쁜 일도 있고, 또 우는 일 있으면 웃는 일도 있고. 그저 하루하루 꾸벅꾸벅 걸어가면 되지 않겠나.
다행히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그 지긋지긋한(?) 악동들. 길거리에서 나를 보면 "어! 문방구 아저씨다! 안녕하세요"라고 하면서 인사를 한다. 쑥스러운 나는 "응, 그래..."하며 빨리 발걸음을 옮기지만, 기분은 괜찮다.
조금 늦게 문을 여는 주말, 채 열지도 않았는데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아이들. 문을 열면 "아저씨! 기다렸어요"라며 밀물처럼 몰려온다. 물건 사고 나서 "수고하세요"라며 자기들도 모를 인사말을 건네고 가는 아이들도 있다.
'쓸데없는 거나 판다'는 손님의 말에도 조금씩 적응되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비법을 충분히 활용한다. 오늘도 난 가게 문을 연다. 악동을 위해, 진상 손님을 위해, 천사 손님을 위해... 오늘도 난 장사한다. 쓸데없는 물건 팔러.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blog.naver.com/clearoad)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