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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미국 자치령인 인구 약 400만 명의 푸에르토리코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여자 아기가 생후 7개월을 지나면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20개월이 지나자 음모가 생겨났다. 세 돌이 되면서부터는 아기를 가질 수 있는 2차 성징, 곧 월경이 시작되었다.

조사 결과 그 아이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가져온 값싼 닭고기를 자주 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닭고기는 모두 산란용 닭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계란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을 높은 농도로 섞은 사료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당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성조숙증 여아가 2000명 정도 나타났다.

얼마 전에는 에스트로겐이 들어간 분유와 그런 분유를 넣은 음료수를 즐겨 먹은 중국의 어린이에게 성조숙증이 나타난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2005년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치료받은 성조숙증 환자가 2001년 1158명보다 4.6배 늘어난 5274명이라고 밝혔다.

어린이의 성장을 저해하는 성조숙증은 뜨거운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식기에서 배출되는 환경호르몬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전문가들은 운동 부족과 지나친 영양 섭취가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산업축산으로 길러지는 소와 닭들은 계란과 우유의 생산량 극대화를 위해 에스트로겐을 주입받는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어린이들이 이들 계란과 우유를 다량 섭취함으로써 영양을 과다하게 섭취한다. 성조숙증의 배경에 과학축산의 어두운 그늘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이 만든 '탐욕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동물들의 삶을 살핀다. 동물들을 공장의 생산 수단쯤으로 여기는 산업축산의 비정한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다.

이 책에 담긴 문제의식의 핵심은 부제에 달린 '우리가 이룬 디스토피아'에 있다. 인간은 자연을 거스른 채 탐욕으로 만든 울타리 안에 동물들을 가두었다. 그런데 저자는 인간이 그 울타리 안에 든 동물들처럼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니냐고 보는 듯하다.

울타리 안팎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몸과 맘이 건강할 때 생태계의 산물인 사람이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구속한다. 자본과 손잡은 거대 과학이 이끄는 대로 길들여졌다. 인간의 탐욕이 만든 인간 동물원에 갇힌 우리는 자신의 내일도 지속가능하리라 확신할 수 없다. 울타리 안의 동물들이 우리 인간의 내일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270쪽)

저자가 고발하는 산업축산의 가장 큰 문제는 최소한의 동물 복지를 무시하는 극대화한 효율성과 반자연성이다. 오늘날 대형 산업축산시설에서 길러지는 소와 돼지, 닭, 오리는 운명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일부 암컷과 극소수 수컷은 죽어라 새끼만 낳거나 정액만 배출한다. 나머지는 모두 고기용으로 길러진다. 빨리 몸집을 불리고 우유를 펑펑 쏟아내야 하며, 알을 쉴 새 없이 낳아야 한다. 좁은 공간에서 과학적으로 조합된 사료를 먹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료 문제를 보자. 저자에 따르면 미국은 생산하는 곡물의 절반 이상을 동물 사료로 전용한다고 한다. 막대한 양의 사료를 위해 화학비료와 제초제, 살충제 등을 써가며 단일 작물을 집중 재배한다. 석유를 과다 투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이다.

옥수수에서 1000칼로리의 열량을 수확하려면 석유 1만 칼로리를 부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산업축산이 가축에게 옥수수가 아니라 석유를 먹이는 셈인데도, 우리는 석유가 아니라 고기를 먹는다고 믿는다며 꼬집는다.

저자는 미국 작가 마이클 폴란이 쇠고기를 많이 먹는 미국인을 두고 '움직이는 콘칩'이라는 별명을 붙인 사실을 지적한다. 오늘날의 소를 '숨 쉬는 햄버거'로 부른 시인의 말도 인용한다. 소를 생명체가 아니라 고기 생산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산업축산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에 따르면 옥수수 사료만 먹는 소는 간이 망가져 보통 5개월을 넘기기 어렵다. 중성이어야 할 소의 위가 산성화하면서 궤양이 생기고, 곧장 위염과 간질환, 면역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강력한 항생물질을 투여받은 소는 그 위기를 넘긴다고 한다. 그 결과 소는 항생제 내성을 강화하고, 쇠고기에 항생제 성분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 쇠고기를 다량 섭취하는 사람들의 면역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산업축산이 과학을 명분으로 가져온 공장식 대량 축산은 많은 문제를 가져온다. 햄버거 패티는 수백 마리의 소 살코기와 지방을 각종 첨가물과 함께 거대한 공정 설비에 넣고 다져 만든다. 세균에 감염된 살코기가 있을 수 있으나 사전에 알아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햄버거 식중독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 수가 200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주요 원인은 대장균 중 주로 'O157:H7'이다.

풀밭이 아니라 분뇨가 켜켜이 쌓인 축사에서 멍한 채 비만이 되어 소화기관이 엉망이 된 소는 겨울이면 1퍼센트, 여름이면 50퍼센트가 내장에 문제의 대장균을 갖는데, 빠르게 돌아가는 도축 공장의 컨베이어에서 지친 인부는 내장을 떠뜨렸던 칼로 고기를 자를 수 있다. 가끔 햄버거 패티로 가야 할 고기 더미에 내장과 내장 속 물질이 섞이기도 한다. 일주일에 평균 세 개의 햄버거를 먹는 미국인 가운데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에서 혈액이 섞인 변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검출되는 이유는 O157:H7 대장균이라고 그 나라 의사들은 일찍이 지적했다. 우리는 괜찮을까? (97~98쪽)

공장식 대형 사육장에서 길러지는 돼지나 닭은 더 처참한 일생을 보낸다. 돼지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위아래 턱의 송곳니 여덟 개가 절단되고 꼬리도 잘린다. 대개 마취도 없이 행해지는 이 시술은 어금니로 어미 젖꼭지를 물거나 새끼들이 서로 꼬리를 물어 상처를 낼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화 후 5일이 지난 병아리도 벌겋게 달아오른 칼로 부리가 잘린다. 서열을 중시하는 고도의 사회성 동물인 닭은 서로 쪼아 상처를 입히는 일이 많은데, 이를 막기 위한 작업이라고 한다. 1분에 15마리 속도로 부리 앞부분의 4분의 1을 잘라내는 과정에서 코가 베어져 죽는 일도 생긴다고 한다.

부리가 잘린 산란용 암평아리들은 사료를 먹을 때만 불이 켜지는 어두운 양계장으로 들어가 120일 동안 몸집을 불린다. 그 뒤 특수하게 제작된 철망상자에 들어가 먹은 사료를 계란으로 바꾸어내는 기계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계란 공장'이 된 닭의 일생은 공장 기계의 신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철망상자에 들어가 1년이 지나면 닭은 하루에 한 개 이상의 계란을 낳던 속도를 맞추지 못하기 시작하는데, 조급한 산업축산은 그 사태를 참아내지 못한다. 무정란만 죽어라 낳다 깃털도 다 빠진 채 기진맥진한 닭들은 털갈이하게 만든다. 이른바 '강제 털갈이'다. 별안간 조명을 꺼 어둠 속으로 24시간 이상 몰아놓고 물은 이틀 뒤, 사료는 사흘 뒤에 다시 주면 닭은 새로운 생리 주기를 맞으며 깃털을 새로 내놓는다. 자연 상태에서 나타나는 털갈이 효과가 강제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후 닭은 두세 달 정도 정상 속도로 계란을 낳지만, 거기까지다. 그뒤 완전히 탈진해 더는 제대로 된 알을 낳지 못한다. 그때 인부의 억센 손에 잡혀 철망상자에서 나오게 되고, 양계장 밖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빈사 상태가 된다. (152~153쪽)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주요 가축인 소와 돼지, 닭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 등 반려동물, 실험동물과 동물원 안팎의 동물들의 참혹한 실상을 두루 살피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홀로세(Holocene)의 공룡'이라는 표현 속에 잘 담겨 있다.

'홀로세'는 '현세의, 최근의' 등의 뜻이 있는 말이다. 과거의 공룡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지구와 거대운석의 충돌로 멸종했다. 그러나 70억 명이 넘는 현세 인간, 곧 홀로세의 공룡은 멸종을 자초한다. 1만 년 전 농경을 시작하면서 최초로 자연을 훼손하기 시작한 인간은 산업혁명을 이루면서 자연과 환경을 본격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대략 500년이 지난 지금 인간은 멸종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간디는 세상은 "모든 이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일본의 생태사회학자 토다 키요시는 세계인이 미국 평균의 삶을 살려면 지구 여섯 개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고 한다. 저자는 세계인이 한국인 평균으로 살려면 지구가 두 개 필요하다는 계산도 소개한다. '탐욕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울타리 밖의 삶을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탐욕의 울타리>(박병상 지음 / 이상북스 / 2014. 11. 25. / 279쪽 / 1,5000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탐욕의 울타리 - 인간 세계에 들어온 동물들의 삶, 우리가 이룬 디스토피아

박병상 지음, 이상북스(2014)


#<탐욕의 울타리>#박병상 지음#산업축산#홀로세의 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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