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는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고정 언론칼럼으로 매주 한 번 <오마이뉴스>에 게재됩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한국사회의 언론민주화를 위한 민언련 활동에 품을 내주신 분들이 '시시비비' 필진으로 나섰습니다.앞으로 김서중(성공회대 교수), 김성원(민언련 이사), 김수정(민언련 정책위원), 김언경(민언련 사무처장), 김은규(우석대 교수), 김택수(법무법인 정세 변호사), 박석운(민언련 공동대표), 신태섭(동의대 교수), 엄주웅(전 방통심의위원), 이기범(민언련 웹진기획위원), 이병남(언론학 박사), 이완기(민언련 상임대표), 이용마(MBC 기자), 정연우(세명대 교수)의 글로 여러분과 소통하겠습니다. - 기자 말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정윤회씨와 '십상시'의 국정개입 논란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시계를 최소 몇 백 년 전으로 돌려놨다. 논란은 <세계일보> 11월 28일 1면 보도로 촉발됐다. <세계일보>는 단독 입수한 '청와대 내부문건'을 근거로 김기춘 대통령실장 교체설은 정윤회씨가 터트린 루머였다고 보도했다.
이후 민정수석실 박관천 전 행정관은 보고서 작성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고, 조응천 전 비서관은 보고서 내용 중 60% 이상은 사실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관련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정윤회씨와 '십상시'들은 '찌라시' 수준의 정보를 모아놓은 민정수석실의 음모라고 되받는다.
조선시대 궁중암투 드라마를 재연하는 듯한 현재진행형 드라마의 주인공은 한명회도 아니고 '정윤회'란다. 대통령 집권 2년차 만에 세상에 드러난 권력암투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단한 민생과 깊은 관계가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민초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그렇고 그런 권력놀음에 가까울 게다.
이제 익숙해진 '대통령의 단호함과 검찰의 신속함'
이른바 '십상시'로 지목된 이재만 총무비서관 등은 <세계일보> 관계자 6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청와대 문건 유출에 맞춰 '국기문란'이라 정의하며 신속한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은 지난 1일 수사팀 배당을 시작으로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 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했고, 명예훼손 혐의와 별도로 청와대 문건 유출 의혹을 분리해 특수부에 배당하고 총지휘도 특수부 쪽에 맡겼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화법은 단호했고, 또 검찰의 응답은 신속했다.
대통령 권력을 이용하려는 구중궁궐의 권력암투를 검찰 수사로 밝힐 수 있을까도 의문이거니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암투의 최종 책임자가 될 수도 있는 대통령이 검찰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더욱이 그것이 권력의 편의에 따른 명백한 이중 잣대라면 국민적 공감이 가능할까.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은 불법 유출된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회의록'을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야당은 대통령 선거에 악용할 목적으로 대화록이 불법 유출되었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의 진위에 관한 궁금증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거꾸로 야당도 아닌 언론에 의해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논란 보고서가 공개되었는데도 청와대가 그 내용보다 문건유출의 경위가 더 중요하다며 '국기문란'에 관한 검찰 수사를 주문하니 쉬 공감이 갈 턱이 없다. 대통령 권력의 맨살이 드러났는데 맨살은 덮어두고 맨살이 드러난 경위에만 관심을 가둬두라는 것은 언론이 언론임을 포기하라는 주문과 결코 다르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안'이 아니라 '공론'
사실 언론의 대통령 권력과 대통령 권력 주변의 의혹제기에 대해 합리적 공론장보다는 검찰 수사를 선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난 4월 16일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보도하면서 정윤회씨와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 <산케이신문> 기자도 검찰 수사를 거쳐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다. 그것도 대통령의 '7시간 사생활' 풍문을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는 건너뛰고 말이다.
물론 언론의 근거 없는 무분별한 의혹제기까지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공론보다 공안에 의존하는 권력의 서릿발을 두둔할 생각은 더 더욱 없다. 공론이 앞서고 공안이 뒤를 따르는 것보다는 공안이 앞서고 공론이 뒤를 따르는 것이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최근 검찰이 지난해 대한문 앞 집회, 탈북자 변론, 세월호 참사 관련자 변론과 관련하여 민변 소속 7명의 변호사에 대해 무더기로 징계개시를 신청한 것도 공론을 포기하고 공안을 앞세운 결과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른바 '법의 지배'.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공안권력의 전횡은 법치와 공론을 죽이고 결국 공안의 신뢰마저도 잃게 한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주문해야 할 것은 공안이 아니라 공론이어야 한다. 가장 달콤한 것 같지만 역으로 가장 위험한 유혹은 절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에 있다. 법치의 밖에서 군림하는 권력이 법치의 이름으로 시민을 윽박지르고 억압하는 체제다.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하게, 상대방에게는 봄바람처럼 대하라는 의미의 이 글귀를 생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도 즐겨 썼다고 한다. 1976년 원단 휘호로도 남아있다(<위대한 생애>, 민족중흥회 발행).
그런데 박 대통령은 도리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호한 편인 듯하다. '지기춘풍 대인추상(持己春風 待人秋霜)'인 셈이다.
네 편 아니면 내 편만 있는 탓일까. "누가 대한민국의 앞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검찰을 보게 하라"는 비아냥거림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지금 진정으로 시비해야 할 것은 공안의 범람이다. '쿼바디스 대한민국'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http://www.ccdm.or.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변호사이자 민언련 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