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인터스텔라>로 인기몰이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2000년작 영화 <메멘토>로 '기억'을 말한 바 있다. '단기기억손실증'을 앓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감독은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새로운 기억을 쌓지 못하는 남자는 몸에 글씨로 문신을 새기고, 메모를 남긴다. 조금전까지의 기억이 사라진 상태를 염두에 두고, 미래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속 주인공도 다르면서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는 '새로운 기억'이 30분 마다 지워진 뒤, 이를 다시 떠올리지 못하면서 미래를 잃고 과거에 갇혀서 살아간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 '기 롤랑'은 어느 시기의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과거를 어둠에 묻어놓은 채로 살아온 인물이다.
사설탐정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기'는 고용주가 은퇴하면서 자유로운 신세가 된다. 여유가 생긴 그는 내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기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내기로 결심한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가는 주인공
그는 자신의 고용주였던 '위트'의 도움을 받는다. 탐정으로 일하던 그는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나면서 기에게 자신의 인맥과 정보를 얻는 루트, 거기다 탐정 사무실까지 모두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기 롤랑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작은 정보를 지푸라기 잡듯이 뒤져나가면서 관련된 인물의 정보를 캐낸다. 그렇게 찾아낸 인물과 만나서 과거에 대한 차분한 대화를 시도한다. '혹시나 나를 알아볼까'하는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터질 듯한 감정을 안고서.
그렇게 매번의 만남과 연락은 긴장감과 함께 탄식을 불러온다. 어떤 만남에서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릴 만한 정보를 얻지만, 다른 경우에는 해당 인물이 '이미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는다. 미처 다시 만나보지도 못하고 인연의 끈이 끊어졌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 한 부분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듯한 느낌에 슬퍼한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마침내 증발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창유리를 뒤덮고 있는 저 수증기, 손으로 지울 수도 없을 만큼 끈질긴 저 증기에 불과한 존재가 될지도 몰랐다. (본문 227쪽 중에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은 쓸쓸하다. 마치 꺼져가는 불을 간신히 되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기억을 찾아가면서 기 롤랑은 잊은, 혹은 잃은 온기도 되찾아간다. 자신의 과거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멈출 수 없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과거 탐험을 계속 이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그는 계속 조사를 진행한다.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이, 여기저기서 정보를 얻은 기는 조합한 사실을 토대로 과거의 자신을 그려낸다. 몇 명의 이름을 추려서 후보로 지명한다. 그 이름들 중에 과연 과거의 기가 있을지 알 수 없다. 혹은 이 모든 과정이 헛수고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도 엄습한다.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자 그는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수소문한다. 과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중에 그의 진짜 옛이름이 있을까?
세계대전 속에서 고통받는 개인을 그려내다<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의 유럽이다. 주인공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프랑스에서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함에 떨면서 살아간다. 시대와 세계의 무게감이 개인을 처참한 고통 속으로 서서히 밀어넣는다. 그 개인들은 서로 의지하기엔 너무 나약한 상태로 남아 떠돌면서 방황하고 괴로워 한다. 전쟁이 낳은 거대한 비극을, 작가는 한 사람의 시선을 빌려서 담담하게 풍경을 조망하듯 묘사한다.
그림으로 묘사하면 수채화 같다고 할까. 파트릭 모디아노는 짧고 밋밋한 단어를 조합하여 문장을 만든다. 그 문장들이 그려내는 색채는 짙거나 강렬하지 않지만, 두고두고 오래 곱씹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신기루처럼 서 있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과거를 찾아서, 독자는 어느샌가 주인공 기를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가게 된다.
이 책에는 전쟁에 의해, 한 인간의 정체성이 통째로 붕괴되는 과정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소멸된 과거를 찾아서 되살리는 일을 이어나간다. 어쩌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려는 의지에 달려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인간성이라는 것 말이다.
모여서 놀던 아이들이 해질녘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뒷모습에서 느낄 수 있던 상실감, 그 어릴적을 떠올릴 때의 아련함을 글로 옮겨 이야기에 담은 듯하다. 기억의 파편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재구성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한 번의 죽음 뒤에 자신의 생을 되찾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본문 247쪽 중에서)한 남자의 내면에 뚫린 커다란 구멍, 메우지 못할 빈 공간을 작은 기억의 조각들로 채워나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독자를 충분히 매혹할 힘을 지닌 소설이다. '기억'과 '망각'으로 '존재'를 말한 이 책을 읽는다면,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것에 충분히 수긍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씀 /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05. /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