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5일부터 12월 7일까지 2박3일간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 30여 명과 함께 제주 4·3현장을 방문하고 난 후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다시 예전의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주를 방문할 수 있을까? 4·3 당시 제주는 킬링필드였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도망갈 곳도, 별로 저항할 수단도 없는 이들이 맞아죽고, 굶어죽고, 찔려 죽고, 총살 당한 현장이었다. 학살 당한 현장을 사료에 근거해 연재한다. 물론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토벌대로 나섰을 군인이나 경찰, 우익인사들의 소리도 듣고 싶다... 기자 주
지난 5일 오전 8시 반, 여수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구름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여수 앞바다는 어선과 상선들이 오가며 평화롭게 보였다. 겨울에도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여수.
파란 하늘, 맑은 날씨 속에 여수를 떠난 일행은 약간은 들떠 있었다. 그러나 10여 분쯤 후에 나온, "제주의 날씨는 흐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라는 기장의 방송은 답사단일행이 겪을 마음고생을 예보해주는 듯했다.
45분쯤 날아가면 되는 여수-제주 간 하늘 길. 우중충한 하늘 아래 제주공항이 보인다. 서서히 기수를 아래로 향한 비행기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린다. 비행기 문을 연 승무원이 "바깥바람이 너무 세니 나가시면 난간을 꼭 잡고 트랩을 내려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니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과연 제주 바람이었다.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분은 4·3연구소 김창후 전 소장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마음씨 좋게 생긴 미남이다. 시골동네 이장처럼 생긴 김 전 소장. 김전 소장은 2박3일간 우리 일행을 안내하며 끝없이 설명하고 세밀한 것까지 안내해 줬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났을까? 필시 본인의 아픔이 열정으로 변한 것이 틀림없다. 하긴 4·3 때 당시 제주도 인구 28만 명 중 3만 명이 희생됐다. 9명 중 한 명이 희생된 꼴이니 일가친척을 연결하면 관련 없는 집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 전 소장에게 물었다.
"소장님 집안 내력에 가족이나 친척 중 누군가가 4·3 당시 피해를 당한 것 아닙니까?""아니오. 저희 집은 제주 시내에 있어 가족과 일가친척 중 화를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4·3의 진상규명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러한 내력입니다. 가족이나 친인척 중에서 화를 입은 유가족이 이 운동에 나섰다면 방해를 받아 할 수 없었을 겁니다."제주도의 3대 항일운동, 법정사 항일운동·조천만세운동·해녀항일운동김 전 소장이 일행을 안내한 첫 번째 장소는 조천항일기념관이었다.
김 전 소장에 따르면 "조천은 항일운동의 진원지이며 일제강점기 시절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조각상 뒤로 제주도 3대 항일운동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이 그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기미년(1919년)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도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에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다. 1918년 10월 7일 서귀포시 도순동의 법정사에서 일본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며 불교계가 일어난 항일무장 투쟁으로 민족항일운동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제주 해녀들은 예로부터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어용조합장의 횡포가 심해지자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이같은 해녀들의 항일운동은 연인원 1만7130명이 참여해 238회의 집회와 시위를 펼쳤으며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한민족 불행의 씨앗...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점령에 이은 냉전의 그림자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본토를 지키기 위해 제주에 7만여 명의 군대를 주둔 시키고 최후결전을 준비했다. 김 전 소장은 "만약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제주도는 제2의 오키나와가 됐거나 원자폭탄 세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건설한 전투비행장과 수많은 군사시설이 이를 말해준다.
제주도내 370여 개 오름(화산체) 가운데 갱도진지 등의 군사시설이 구축된 곳이 120여 곳에 달하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닷가에는 가미가제의 보트와 탄약이 저장된 갱도들이 널려 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한민족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38도선을 경계로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냉전이 시작됐다. 광복 3년 만에 남북한에는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되고 분단이 고착됐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정이 실시되자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아래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도 건준이 결성됐다.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건준은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고 토지나 산업체 등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를 멋대로 처리하는 것을 막는 치안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실질적인 군정업무를 담당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도착해 도청 요직이나 경찰에 일제시절 관리와 우익인사를 앉히면서 도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1947년 3월 1일 오후 2시 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요란한 총성이 일어나 6명이 사망한 사건은 제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든 불씨가 됐다. 다음 해에 터진 4·3사건과 여순사건, 6·25의 비극의 뿌리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에 이은 냉전의 그림자가 근본 원인이다. 비를 뿌리던 제주 하늘이 급기야 진눈깨비를 뿌린다. 하늘도 울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