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다는 것.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인류의 취미다.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는 음악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도 변화했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1초면 원하는 음악을 생생히 들을 수 있게 됐다. 앉은 자리에서 20년 전 음악을 소환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함을 거부하며 최상의 사운드를 찾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10월, 용산 전자랜드 2층 수입 오디오 상가를 찾아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복고 붐에 편승하는 LP시장'지직, 지지직' Long Player의 줄임말인 LP는 복고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다. 1년 전 tvN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복고 열풍을 불러온 이후 덩달아 LP시장에도 훈풍이 불었다.
용산 전자랜드 2층에 위치한 '금강전자'의 사장 고태환(58)씨는 "20대 손님의 대부분은 턴테이블을 보러 온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뭐든 빨리, 효율적으로 해결하려는 탓에 진득하게 음악을 감상하려 하지 않는다"며 "그나마 근래 들어 가수들이 LP음반을 내니까 젊은 사람들도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1~2년 전부터 '가왕' 조용필부터 지드래곤, 버스커버스커, 2AM과 같은 아이돌들까지 LP음반을 출시하고 있다. 심지어 고인이 된 가수들의 앨범이 LP로 재발매 되기도 한다. 유재하의 유작 앨범, 김광석 4집 등이 대표적인 예다.
아이유, 에피톤 프로젝트 등 젊은 가수들의 LP판 출시와 유작이 된 앨범들이 LP로 부활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스24에 따르면 LP 구매자 중 20대의 비중은 2011년 4.3%에서 2014년 9월까지 10%로, 30대의 비중은 24.1%에서 26.9%로 늘었다. 전체 LP 판매량은 2012년에 전년 대비 66.5%, 2013년에 102.7% 증가했다.
고씨는 "하루에 손님이 5~10명 정도 오는데 그 중 50대 이상이 80%, 30~40대가 10% 이상이고 20대는 극히 적다. 그런데 20대가 LP에 관심을 가져주니, 그 자체로 고맙다"고 말했다.
직접 와서 들어보는 맛평일 1시경 용산 전자랜드에는 상인이 손님보다 더 많은 상황이었다. 용산 전자랜드 수입전자 상우회 회장 임한식(57)씨는 "용산 전자 상가가 한가해진 데에는 인터넷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 직접 물건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다. 실제로 용산 전자상가에 오프라인 매장들 중 온라인 판매를 겸하고 있는 매장이 많았다.
그러나 수입 오디오 판매 매장은 예외였다. 용산 전자랜드 2층 매장 '마이웨이'의 사장 김아무개씨는 "오디오는 직접 와서 소리를 들어봐야 하기 때문에 온라인 판매를 적극적으로 할 수 없다"며 "오프라인 매출 비중은 여전히 크게 차지하는 게 오디오 매장들"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오디오 매장들은 컴퓨터나 카메라 매장들처럼 손님들이 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몇 있는 손님들은 사장과 함께 그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었다. 여러 오디오를 들어보며 소리의 결을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마산에서 서울로 출장을 온 김에 잠깐 들렸다는 회사원 박아무개씨(46)는 "수입 오디오가 대부분 몇 달 월급을 모아야 할 만큼 비싼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음악을 음악답게 연주하는 그 매력 때문에 끊지 못한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고급 취미를 즐긴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싸다는 기준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300만 원짜리 낚싯대를 사서 바다낚시에 가는 게 인생의 행복이다. 고로 자신이 느끼는 만족에 비하며 그 낚싯대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연주장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전달해주는 오디오이기 때문에 형편이 크게 넉넉하지 않아도 포기할 수가 없다."'금강전자'의 사장 고씨는 "수억 원대에 달하는 하이엔드 오디오의 경우 경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히 나간다"고 했다. 하이엔드 오디오의 가치를 묻자 그는 "오래 들어도 귀가 아프지 않고 베토벤의 마음, 음악을 만든 제작자의 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물건"이라 평했다.
고씨는 "현재 오디오 매장에 있는 90%가 수입 오디오"라며 "대부분이 영국, 일본, 미국, 이탈리아, 덴마크 기업에서 생산한다"고 말했다. 소비층의 대부분이 50대 이상이고, 국내 기업들이 제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오디오 시장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음악을 듣는 것은 오랜 문화이기 때문에 절대 사양산업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오디오 시장에서 국내 기업을 찾기 힘든 현실에 불만을 갖는 소비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권아무개씨(49)는 "40, 50대가 오디오 구입하는 취미로 돈을 쓰려고 해도 외제품밖에 없는 실정"이라며 "오디오를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인정하고 나라에서도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소량생산을 해야 하는 산업 특성 탓에 삼성, LG와 같은 국내 대기업들도 하이엔드 오디오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국내에서 오디오를 생산하는 업체들은 대부분 군소업체들이다. 오래된 문화, 예술의 가치를 잃지 않고 가치를 창출해내는 군소 업체들에 대한 지원과 오디오 시장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음악 감상에 필요한 건 돈이 아닌 마음의 여유" LP, 진공관, 오디오는 고급 취미라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턴테이블과 수입 오디오들은 수백 만원에서 하이엔드 오디오는 수억을 호가한다. 이에 따라 "과시용으로 오디오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마이웨이' 매장의 사장 김씨는 밝혔다. 그는 "오디오를 취미로 하는 데 중요한 건 돈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의 오랜 단골 이아무개씨(55)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아무리 비싼 오디오도 무용지물일 뿐이다"이라며 "업무 때문에 몸이 바쁘거나 10분이라도 조용히 눈을 감고 감상할 시간이 없으면 수천, 수억 들여서 사도 즐길 수가 없다"고 말했다.
"국내 오디오거리의 80%가 여기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고 말하는 용산 전자상자 수입 오디오 매장의 사장님들. 매장 한 켠에 손때 묻은 오디오 책들은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오디오 사랑에서 세월을 견뎌온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용산 전자랜드의 여타 매장들처럼 손님 발걸음 소리가 좀처럼 나지 않는 오디오 매장들이지만 그곳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수년 단골들과 자판기 커피 향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초고속, 최첨단을 홍보하는 용산 전자랜드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유일한 아날로그의 공간이기도 했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오디오들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오늘도 하루 더 나이를 먹어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