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6일, 여행 36일째.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쉬켓에서 일본인 여행자들을 만났다. 서로 왜 여행을 하는지 이야기가 오가던 중, 나는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다큐멘터리 음악이 날 이곳으로 이끌었다고. 비슷한 또래였던 우리들은 그 음악들을 들으며 감상에 젖었고, '발티카 No. 7'이라는 러시아 맥주를 마셨다. 건배사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패러디한 '당신의 실크로드에 건배'. 이후로도 계속 서쪽으로 여행했다. 경주에서 시작해 로마까지. 다섯 달이 걸렸다. 여행은 끝났지만 건배사는 여전하다.
'당신의 실크로드에 건배'노처녀, 실크로드에 가다 언제부터인지 눈에 보이게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상은 축구가 아니니, 태클을 바꿔 표현하면, '시비'다.
"언니, 저도 3년 후에 언니처럼 되어 있을까 두려워요.""뭐래?""저도 언니처럼 3년 후에도 시집을 못 가고 있으면 어쩌죠?"3살 어린 후배의 술주정이었다. 평소에도 개념이 없지만 술만 취하면 더욱 없어지는 후배다. 그녀는 몇 주 후 다시 주옥같은 명언을 남겼다.
"언니, 오 선배님이 그렇게 성질 부리다 언니처럼 시집 못 가고 노처녀로 늙고 싶냐고 그러셨어요. 깔깔깔."오 선배랑 둘이 그런 이야기를 한 걸, 술에 취해 옮긴 거다. 이쯤 되면 다소 고의적이다. 그녀에게 나는 닮지 말아야 할 인생 모델이었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노처녀 선배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선배와 얼마든지 뒷담화를 할 수 있는 존재인 거다. 이들은 내 뒷담화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을 정말 좋아하는데, 결혼 좀 안했다고 감히 날 무시하다니. 부아가 치민다. 더는 평점심을 유지할 수 없어서 화를 냈다. 결국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오명만 늘었다.
작년부터였다. 외부 태클들이 눈에 보이게 늘어났다. 하나로 정리를 하자면 '너는 왜 다르게 사니?'라는 질문이었다. 특히 결혼에 대해 앞서의 무개념 후배처럼 눈에 드러나는 공격이 많았다. 다름에 대해 주어지는 공격. 마치 닭장 안에 색이 다른 병아리가 들어왔을 때처럼 쪼아댄다. 이러다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다. 아니,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다고...
나이가 들면서 듣게 되는 태클은 결혼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미묘한 태클도 있었다.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들의 세계, 바로 '명품백'이다. 일명 명품백이라고 불리는 종류를 사본 적이 없다. 선물을 받아본 적은 있다. 하얀 가방이었는데 펜의 잉크가 쏟아져서 얼룩이 졌다. 나중에 그 가격을 알고 속이 쓰렸던 기억이 있다.
명품백을 안 사는 데는 딱히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다. 일단 지불할 능력이 없고, 그 가방 들고 갈 데가 없다. 그렇다고 명품백을 사는 것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돈 가지고 좋아하는 물건을 사겠다는데 그걸 가지고 된장이니 고추장이니 가타부타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 단지 나는 딱히 그 가방이 가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대신 소비로 공허함을 채우는 현대인의 고질적 질병은 다른 방법으로 달래고 있다. 주로 사회나 정치 기사를 페이스북으로 공유하며 욕을 쏟아붓곤 한다.
하지만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자, 이상하게 내게 명품백을 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느 날 친구가 오더니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와 가방을 자리에 앉혔다. 둘이 만나는 줄 알았는데, '가방님'까지 합석하셔서 3명이다. 비싼 가방이란다. 하루는 옆 동료에게 "가방 좀 좋은 거 들고 다니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가방으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그 나이에 싸구려 가방을 들고 다니면 무시 받는단다. 친구는 내게도 하나 사두라고 했다. 그런 건가. 여태 무시 받는데도 몰랐던 건가. 후배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랬다.
"언니, 여자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좋은 가방 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요."진심으로 신경질난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나이 들었으니 좋은 가방 들고 다니라는 소리나 듣다니. 앞서 '노처녀' 건과 종합하면 나는 "명품 가방 하나 없는 노처녀"인 거다. 이상하다. 나이가 들면서 왜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자꾸 중요해지는 걸까? 그리고 왜 루저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늘 반짝반짝 빛난다고 생각한 즐거운 인생이었다.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에 내가 느낀 것은 위기감이었다. 나는 늘 내가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원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그리고 원 안의 사람들은 '너는 왜 다르니?'라고 물으며 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은 돈을 싸들고 시집이 아닌 여행을 갔다.
여행의 시작은 한 카세트 테이프 때문이었다.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용한 유일한 마약이던 중학교 2학년 시절, 리어카에서 천 원짜리 짝퉁 카세트 테이프를 샀다.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사운드 트랙이다. 오토리버스로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얼음이 부서져 반짝반짝 빛나는 환상을 봤다. 얼음은 땅에 닿으며 금빛 모래로 변했다. 둔황, 흑수성, 타클라마칸 사막과 같은 지명들을 외우며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겨울방학엔 침대에 엎드려 손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으며 책만 읽던 윤택하던 청소년기였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내가 생각하던 어른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고도 한참 다시 세월이 흘렀다. 여러 곳을 여행하고 여러 나라에서 삶을 살며, 유랑하는 인생을 살았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남들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실크로드의 꿈은 잊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품가방 하나 없는 노처녀' 사건은 오히려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남의 시선' 때문에 원치도 않는 비싼 가방을 구매한다면 그게 제대로 된 인생일까? 마치 '인생의 낙오자로 보인다'는 이유로 결혼을 해야 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일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원안에 들어서길 선택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망설이던 순간, 나는 오랜 꿈이던 실크로드에 가기로 결심했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것은 유령을 따라가는 것이다경주에서 출발해 중국, 중앙아시아, 이란, 터키를 넘어 로마까지 가기로 했다. 주변에선 대부분 무모하다는 평이었다. 여자 혼자 위험하니 남자를 데리고 가라는 충고도 들었다. 공짜로 갈 남자는 없고 누굴 데리고 가려면 돈 주고 인력을 사야 하는데 그럴 돈은 없었다.
정확히 뭐가 위험하냐고 되물으면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못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막연히 위험한 곳. 내가 가려는 여행지에 대한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잘 모르는 곳이긴 하다. 가 봤다는 사람도 드물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은 한국어로 된 가이드북조차 없다. 이란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심지어 이란이 아직도 이라크와 전쟁 중인 걸로 아시고 계셨다. 참고로 1980년에 시작한 이란·이라크전은 1988년에 휴전, 1990년에 완전히 끝났다.
우리는 실크로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실크로드라는 이름 자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1984년 4월, KBS에서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시리즈가 첫 방영됐다. 사람들은 이름만 알고 있던 길이 아직도 끊기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에,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사막과 화려한 전통복을 입은 낯선 이들의 존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한국 영상물 사상 VHS 비디오로 가장 많이 팔린 영상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실크로드.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다양한 갈래의 교역로, 사막을 건너던 낙타 대상들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졌던 길들이다. 하지만 1877년 독일의 탐험가 리히트 호펜은 이 길들을 총칭하여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름을 찾은 길은 생명을 가지고 다시 피어났다.
얼핏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사막과 같은 사막지대와 천산산맥, 파미르고원, 힌두쿠시 산맥과 같은 높은 산악지대를 잇는 험한 루트다. 사람들은 사막을 피하고, 오아시스를 연결하고, 덜 가파른 산을 선택하며 다양한 길을 만들었다.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물건을 교역하고, 믿음이나 지식, 삶의 방식을 함께 나눠 가졌다. 옥, 비단과 같은 사치품 뿐 아니라 인쇄술, 화약과 같은 기술도 이 길을 따라 건너갔고, 인도에서 유행하던 석굴은 이 길을 따라 경주 토함산까지 와서 자리를 틀었다.
20세기 초엔 다양한 나라에서 온 탐험가들이 이 길을 걸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은 장경동의 고서를 발굴해 둔황 막고굴을 세계에 알려냈다.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은 갈 때마다 죽을 위기에 처하거나 부하가 죽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멸망한 도시와 숨겨진 보물에 매혹된 그는 탐험을 멈추지 않았다. 운은 정말 나쁘지만, 누란왕국과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를 발견한 사람이다. 당시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잘 나간다는 열강들은 이곳에 묻혀 있다는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모래바람에 묻히고 잊혀진 실크로드. 지금 이 실크로드가 지나는 나라들은 우리에게 멀고 낙후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살아있는 길, 실크로드 240일>의 저자 콜린 더브런은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것은 유령을 따라가는 것이다. 실크로드는 아시아의 심장부를 관통하지만, 그 길은 공식적으로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분명치 않은 경계선, 지도에도 등재되지 않은 민족들 같은 그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름만 남아 있고 모든 것은 희미한 곳, 시집 대신 내가 가려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