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제주도를 찾았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면 매번 혼자서 역사탐방을 다니곤 한다.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20년 가까이 살았다지만, 내 고향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떠나온데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금과 같은 14~19살까지의 시간을 고입과 대입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지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 나서야, 그것도 '취업'이라는 목숨을 건 사투에서 동떨어진 예술계통의 대학을 가서야(결국 뒤늦게 취업의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지만), 자연 속에서 나의 예술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야, 고향을 둘러보고자 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 올해의 겨울, 내가 둘러본 나의 고향풍경은 이러했다.... 기자말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학창시절 국어책에서 한 번쯤은 읊어봤던 시 한편. 김 기림의 <바다와 나비>. 근대 문명 앞에서 시인 자신이 꿈꾸었던 바가 좌절됨으로써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나비'로서 형상화 한다. 이 시가 이 푸른 밭을 지날 때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내 개인적 삶의 목표에 대한 좌절이 김기림의 시와 닮아서일까.
사진 속에 이 길은 2014년 12월 19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백조일손지(百組一孫 地)묘로 향하는 길의 풍경이다.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양 옆으로 시원하게 푸른 양배추 밭이 펼쳐져 있다. 눅눅하게 바닷물을 머금은 보롬(제주 사투리. 바람을 뜻함)이 사납게 불어와 청색의 넓적한 배춧잎들이 펄럭이는 그 밭은, 끝없이 파도가 일어 잔잔할 틈이 없는 제주도의 거친 바다를 닮았다.
청(靑)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는 '나비'에게서, 거센 역사의 파도 속에 이리저리 치이며 고통 받고 숨죽여온 평범한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학생, 부모자식, 그 후손들이 순간 떠올랐다면, 과도한 연상일까.
백조일손지의 묘역, 묘비가 건립되기까지
'백조일손지의 묘역'이란 '조상이 다른 일백서른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라는 뜻의 묘지이다.
1950년대 6·25 전쟁 발발 전후로 올라가보자. 당시 제주도에는 4·3이라는 커다란 피바람의 불길이 조금은 사그라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것도 잠시.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내무부 치안국에서 '예비검속법'을 적용해 전국 각지의 요시찰인(사상이나 보안 문제 따위와 관련하여 행정당국이나 경찰이 감시해야 할 사람)을 검속하라는 지시를 한다. 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요시찰인 및 입산자 가족 1200명 가량을 예비검속했는데, 이때 이곳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을 검속했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후퇴하는 와중에, 당시 육군 정보국 과장은 예비검속자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경찰이 자의적으로 분류한 예비검속자들은 일본군이 사용했던 폭탄창고 섯알오름 구덩이에서 처참하게 집단 학살되어졌다. 때는 음력 7월7석, 까마귀와 까치 떼가 다리를 놓아주어 견우와 직녀가 만나게 되는 날, 긴 이별의 날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학살되어 선혈이 낭자한 시신은 미리 준비된 돌덩이로 짓눌러 암매장하고 그 일대를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다스렸다. 당시 이런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한 유족들은 학살현장을 찾았지만, 경찰들은 공포를 쏘며 엄습해왔다. 결국, 유족들은 공포에 떨며 슬픔을 억누르고 시신 수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유족들의 시도가 이어졌으나 변변히 무장군인의 저지로 눈앞에 버려진 가족들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죽은 고인들을 인도하지 못하고 비명과 절규 신음조차 내지 못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유족들은 6년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웃의 질시와 능멸을 겪어야 했고, 후손들은 연좌제로 입신양명이 차단된 채 망연자실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적용된 '예비검속법'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이 탄압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지은 법으로 죄를 지을 개연성이 있는 이를 사전에 구금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1945년 10월 9일 미군정청(미군 육군 사령부 군정청)에 의해 폐지된 법이기도 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법에 의해, 군경의 자의적 판단으로, 군·경을 피해 입산한 이들의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역사의 바다 속으로 날개가 젖어 가라앉아야만 했다.
묘비는 1959년 5월 08일, 유족들의 정성을 모아 건립되었다. 그리고 1960년 4·19혁명 직후, 과도정부 임시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관한 결의안'이 가결되어 잠시나마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참의원 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진상조사가 진행되던 차,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진상조사가 중단되고 유족들은 기나긴 세월을 연좌제라는 쇠스랑을 차고 살아가야만 했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세워야 했기 때문일까, 5·16군사정권은 군경이 자행한 반인륜적인 만행의 흔적을 없애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곳 묘비 또한 파괴되고 묘역을 해체하도록 강압 받았다고 한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서야 무너진 묘비를 다시 세우고 위령사업의 필요성이 점차 공론화되었다. 이념갈등을 극복하고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유족회가 주관하고 제주도의 후원으로 1993년 8월 24일 위령비가 수립. '제 1회 백조일손 영령 위령제'가 엄수되기에 이른다.
'조상이 다른 일백서른두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느니 한 자손이라.' (제안 : 故 이치훈, 이성철)6년이 지나고 유족들이 그들의 시신을 구덩이에서 수습하는데, 흙탕물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켜 자타를 구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구덩이 속에 물을 양수기로 흡출하고 132개의 칠성판 위에 머리하나, 등뼈, 팔, 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고 현 묘역에 안장하였다고 했다(본래는 149구가 수습되어졌으나, 17구의 시신은 후환이 두려운 유족들에 의해 개인묘지로 옮겼다).
내가 태어나 발 딛고 뛰어놀며 자라온 땅. 비행기를 타고 먼 하늘에서 바라볼 때면 너무나 투명하고 맑아 마음이 정화되는 땅. 가까이서 보면 할머니의 손처럼 푸석하지만 보드라운 땅. 이 땅이 반세기 전만해도 붉게 피에 물든 학살의 땅이었음이 믿겨지지 않는다.
서북청년단과 같은 테러 집단이 필요하다는 극우세력올해 12월 16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4년 북한의 주요 통계지표'에 따르면, 남북한 국민총소득(명목GNI) 격차가 40배를 넘어서고 무역액은 146배에 이른다고 분석됐다. 이처럼 남북체제경쟁은 무의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개탄스럽다.
과거의 어지러운 역사와 극으로 치닫는 좌우 이데올로기 속에서 잉태되었던 반인륜적인 테러집단인 서북청년단(서청)을 재건하겠다는 이들이 시청광장에 등장한다. '노란 리본 지겹다!'며 소리치고, 시민들이 마음을 담아 매달아 놓은 노란리본을 강제철거를 하겠다고 몸싸움을 벌인다.
얼마 전 <시사인> 378호에 실린 인터뷰에서는 서청 상임 부총재 이창우씨가 독일의 '네오나치'와 미국, 일본 극우단체의 예를 들며, 그런 단체들이 나라를 위한 역할을 일부 담당한다면서 서북청년단이 법이나 국가권력으로 안 되는 일을 대신해줄 수 있는 과격한 단체임을 당당히 자임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등장은 제주도 도민이었던 내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제주도 앞 바다는 저리도 아름답기만 한데, 우리나라의 모습은 초승달이 시리기만 하다.
원조 서북청년단의 활동증언원조서북청년단은 북에서 쫓겨 내려온 이들이 1946년 11월 30일에 만든 극우 반공 단체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혈혈단신이며 직업도 없었던 이들의 처지와 성향을 이용했고, 주로 좌익으로 의심되는 이나 좌익 인사에 대한 테러를 가했다(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 또한 서북청년단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무지하고 과격했던 이들이 제주 4·3 사건 때 절해고도인 제주도에까지 파견되었다.
전 4·3중앙회 전문위원 김종민씨가 쓴 논문 <4·3이후 제주50년>에 수록된 제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청은 처음에는 주로 엿장사를, 세력이 커지자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강매했다. 4·3이 발생한 후 이런 강매를 거부한 이는 대부분 총살됐다고 한다.
4.3 초기에는 '말태우기', '뺨때리기'가 유행했다.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한 후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말 타는 시늉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딸에게 아버지 볼기를 때리도록 시켰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또한 주민들을 모아 모두 홀딱 벗긴 후 남녀를 불러내, 심지어 장모와 사위를 물러내 성행위를 강요하다 총살했다. 여성들을 잡아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국부에 무를 쑤시거나 달군 쇠로 지졌고 급기야 칼로 난자했다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