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하지원 주연으로 주목받고 있는 영화 <허삼관>의 원작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다. 제목 그대로 허삼관이라는 남자가 피를 팔아가면서 사는 이야기다.
아홉번 피를 판 남자의 일생주인공 허삼관은 왜 피를 팔았을까? 소설의 제목만 보고 자칫 피를 팔 정도로 생계가 곤궁한 민초의 억척스러운 삶을 그려낸 대서사극 정도를 상상했다면 틀렸다.
소설은 대하드라마 보다는 '블랙 코미디'쪽에 가깝다. 분명히 웃기는 장면인데 슬픔이 배어나온다. 웃기기 때문에 더 먹먹하고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처럼. 이 소설이 그렇다. 처절하다기보다는 찌질하다. 슬픈 것 같다가도 금세 웃음이 터져나오는 사건과 대사들이 이어진다.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었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흔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십칠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 (171쪽)1950년대 중국, 현대사의 격랑속에서 전 인민이 곤궁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범죄행위지만 매혈(賣血)이 허용되던 시절(한국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혈액이 부족했던 시절, 혈액 수집 방법으로 허용되다가 1975년에야 비로소 '매혈금지법'이 제정됐다).
허삼관은 일생에 걸쳐 아홉번 피를 판다. 그러니까 소설은 허삼관이 아홉번 피를 팔아야 했던 에피소드를 엮은 것이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공장 노동자 허삼관은 생애 처음으로 피를 뽑아 장가갈 밑천을 마련한다. 덕분에 마을에서 가장 어여쁜 아가씨, 허옥란을 아내로 얻을 수 있었다.
허삼관은 아들 셋을 낳고 평범한 삶을 이어나가던 중, 첫째 아들 일락이가 알고 보니 남의 자식이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9년 동안 키운 세월과 정성이 아까운 나머지 모든 집안 일에서 손을 떼고 허옥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빈둥빈둥 세월을 보낸다.
일락이를 제 아비에게 보내버리기도 하고, 친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대놓고 차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허삼관은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을 때려 병원비를 물어주어야 할 때나, 간염에 걸려 생사를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피를 판다. 특히 간염에 걸린 일락이를 상하이 큰 병원에 입원시키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연속해서 피를 팔다가 쇼크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눈물겨운 부성애를 보여준다.
피를 팔기 위해서는 몸에 피가 많아야 하는데, 허삼관은 물을 많이 먹으면 피가 많아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병원에 들어가기 전 물을 열 사발씩 억지로 들이키는 장면,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방광이 터질 지경이 되었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는 장면, 참다가 참다가 어떤 이는 결국 방광이 터져버린 이야기 등. 생계를 위해 피를 파는 장면은 이처럼 코믹하게 묘사되면서 코 끝을 찡하게 만든다.
허삼관이 60을 넘긴 나이, 평생에 단 한 번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팔 결심을 한다. 돼지 간볶음과 황주 두 잔을 사 먹기 위해서다. 이전에는 자식들을 위해 피를 팔고 나서 보양식으로 먹었지만, 이제는 온전히 그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마음에 다시 한 번 피를 팔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60이 넘은 노인의 피를 사줄 리 만무하다. 병원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난 허삼관은 온 동네가 다 알 정도로 대성통곡을 한다. 허옥란의 손에 이끌려 간 식당에서 비로소 허삼관은 말한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야."슬프고도 유머러스한 '평등'에 관한 서사위화는 이 작품을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저 피를 팔면서까지 억척스럽게 생계를 이어야 했던 한 남자의 일생일 뿐인데 생뚱맞게 '평등'이라니. 작가 서문에서 밝힌 이 '평등'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도대체 어느 대목에 평등의 의미를 꼭꼭 숨겨 두었단 말인가. 숨바꼭질에 대한 답은 '허삼관'이라는 인물 자체에 있었다. 그도 평등을 꿈꿨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추구한 평등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머리가 단순해서, 잠잘 때야 꿈을 꾸겠지만 몽상 따위에 젖어 살지는 않는다. 깨어 있을 때는 그도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야곱 알만스의 백성과 달리 그는 절대로 죽음을 통해 평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생활이 그렇듯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아주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생활의 편리함이나 불편 따위에는 개의치 않지만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만다. (9쪽)허삼관은 일락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모든 집안일에서 손을 떼고 빈둥빈둥 노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내 허옥란이 9년 동안 자신을 속였으니 그가 노는 것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일락이가 방씨네 아들을 돌로 쳐 머리를 깼을 때도 그 병원비를 받아오라며, 아들을 제 친아비에게 보내버린다.
자신은 9년을 키웠으니, 그 친아비가 병원비 정도 대신 내는 것은 대단히 후하게 봐주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친아비 하소용이 병원비 내기를 거부하고 일락이를 인정하지 않자, 허삼관은 '우리 가족의 불행은 모두 하소용 때문'이라며 그에게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고 아들들을 가르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허삼관은 매사가 이런 식이다. 허삼관식 평등은 사실 평등이라기보다는 '균형'에 가깝다.
사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평등'을 포기하는 대신, 자잘한 일상의 균형을 맞추는 데 급급하고, 그렇게 맞추어진 균형에서 위안을 찾는 소시민들 아닌가. 모두가 차별이 없이 인간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평등의 본래 목적은 평생 이룩하기 어렵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사는 세상과 쪽방촌 노인이 사는 세상이 다른 것처럼, 일상에서 평등은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진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평등이 찾아온다. 죽음은 이건희 회장에게나 쪽방촌 노인에게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허삼관 매혈기>에서 거창한 평등의 이미지는 하찮고 찌질하게 변주된다. 작가는 오히려 '허삼관'을 통해 일상에서 소시민의 평등이란 '처지의 비슷함' 혹은 '삶의 공감대'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것 같다. 고난에 찬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어쩌면 평등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너와 내가 나누어먹는 '밥 한 공기' 속에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피를 팔러갔다가 쫓겨난 허삼관은 아무리 노력해봤자 '세상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건희 회장의 세상과 쪽방촌 노인의 세상이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허삼관은 일생동안 평등을 추구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그의 몸에서 자라는 눈썹과 좆 털 사이의 불평등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 (10쪽)자, 이제 곧 영화가 개봉한다. 원작에서 작가가 말하는 '평등'의 의미를 감독 하정우는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해냈을지 정말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허삼관 매혈기>(위화 지음/푸른 숲 펴냄/1999.2.3./351쪽/1만2000원)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