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유신독재의 깊숙한 곳, 궁정동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유신독재의 정점인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으니 유신독재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18년 장기집권의 끈질긴 명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사망하자 곧바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민간인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군복을 입고 고압적인 얼굴로 TV에 나와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수사발표'라는 것을 한다.
계엄사에서는 연일 무슨 무슨 '경고한다!'라는 것을 발표하고, 계엄포고령도 발표한다. 계엄포고령에 의해 모든 집회는 불허된다. 노동조합의 정상적인 활동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이소선과 청계조합원들은 지금 아무리 군인들이 설치는 세상이지만 군인들이 언제까지 민간 영역에서 설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군부 쿠데타로 집권을 해서 그 지긋지긋한 군부독재를 18년간이나 했는데 또다시 군인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는다면 이제는 국민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계노조는 계엄상황이지만 노동조합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977년 노동교실 사건으로 많은 피해를 당한 데다가 1978년 조직 내부 갈등으로 흐트러진 조직을 정비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참, 야비한 새끼들... 건물주 앞세워 탄압하다니"조합원 교육을 통해 활동인자를 늘려나감으로써 조직 강화를 꾀하고, 아울러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1977년에 빼앗긴 노동교실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조에서는 1977년 이후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의 적당한 건물을 세 얻어 입주해서 노동교실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노동교실로 쓰기 위해 세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에서 세를 얻는다고 하면 건물주들은 기겁을 하고 계약을 취소한다. 요행이 건물주와 계약을 해서 입주를 하더라도 일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쫓겨 나와야 했다. 노동교실이 입주한 건물주에게 중앙정보부, 경찰, 세무서 등이 나서서 노동교실을 내쫓으라고 압력을 가하니 이러한 압력을 견딜 건물주가 있겠는가? 압력을 받은 건물주는 마치 죽기를 각오한 듯이 노동교실을 내쫓았다.
이소선은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참, 야비한 새끼들! 지놈들(정부 당국)이 직접 내쫓는다면 우리가 끝까지 싸우기라도 하겠지만, 죄 없는 건물 주인을 앞세워 탄압을 하니 건물 주인하고 죽고 살기로 싸울 수도 없잖아!"이때부터 이소선과 청계노동자들은 노동교실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 명의의 건물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을 갖게 됐다.
유난히 추웠던 전태일 9주기 추도식계엄정국은 날이 갈수록 꽁꽁 얼어붙었다. 유신독재를 완전하게 끝장내기 위해서는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의 준동을 저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재야 민주세력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등장을 막기 위해 은밀하게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오직 관혼상제만 허용되기 때문에 결혼식을 가장한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이 'YWCA 위장 결혼식'이다.
이 무렵 1979년 11월 13일 전태일 9주기 추도식이 마석 모란공원 묘소에서 열렸다. 그날의 추도식은 정치적 상황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날씨마저 유난히 추웠다.
계엄령으로 위축된 분위기라 추도식에 조합원 참석도 저조하고 청계 조합원 이외의 사람들도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추도식을 집전할 목사님도 쉽게 모실 수가 없었다. 목사님들도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선교교육원 원장님으로 계시던 서남동 목사가 흔쾌히 추도식 집전을 맡아주시기로 했다.
서남동 목사는 '민중신학' 이론 설교뿐 아니라 실천도 철저하게 하시는 목사로 늘 노동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었다.
서남동 목사는 계엄하 엄혹한 상황에서 추도식 말씅을 통해 거리낌 없이 유신잔당을 비판하고 신군부가 등장 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추종자들이 인위적으로 신화를 만들지만 전태일처럼 정의로운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화가 없었지만 죽어서 그 신화가 만들어지고, 그 신화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한테 선하게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는 똑같은 두 죽음이지만 대비가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그러면서 서남동 목사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서 번쩍 추켜올린다.
"여러분! 이 책을 보십시오. 이 책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젊은이의 아름다운 신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은 여기 전태일 열사의 일생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청년 전태일의 일생을 기록한 책이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출판되지 못했지만 이웃 일본에서 출판이 됐습니다."서남동 목사는 당국의 탄압이 예상돼 우리 나라에서는 출판하지 못한, 일본에서 일본어로 먼저 출판된 <전태일 평전>을 구입해 가지고 온 것이다.
"독재자는 스스로 권력이라는 아성으로 쌓아놓은 신화가 무너졌습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신화입니까! 이제 민중의 뜨거운 사랑으로 쌓아놓은 아름답고 튼튼한 신화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야 하겠습니다. 여기 전태일은 그 신화를 창조해낸 장본인입니다."초겨울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 부는 산비탈에서 노(老) 목사의 뜨거운 외침은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이소선은 설교를 마친 목사한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것을 헤치고 나아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선지자가 있기에 우리 노동자들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그 선지자적인 말씀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우리는 어머님을 보면선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그날 참가자들은 추위와 쓸쓸함 속에서도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하산했다.
이소선은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산 아래의 상황은 더욱더 절망적일지라도 우리는 거기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다시 희망을 일궈야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