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에는 서른 개가 넘는 지역언론이 있다. 그 가운데 협동조합이라는 틀에서 출발한 독특한 언론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콩나물신문>(www.kongnews.net)이다. 이 글은 <콩나물신문>의 새내기 기자가 동네 사람들과 부대끼고 뒹굴며 신문을 만들다 겪는 이런저런 일들을 온전히 기자 마음대로 적는 글이다. <콩나물신문>이 어떤 신문이고 왜 이름이 '콩나물'인지 한 번에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아직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실험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연들이 쌓여갈수록 <콩나물신문>은 잘 자란 콩나물처럼 점점 토실해질 것이고 또 그런 콩나물들이 수북이 담긴 시루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 기자 말
대학 동기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저 멀리 서울 삼성의료원까지 다녀왔다. 막 울고 가슴을 치고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거기서 만난 동기들에게 내 손으로 정성껏 말아놓은 담배들을 나눠줬고, 가방에 들어 있던 <콩나물신문> 19호를 뿌렸다. 녀석들은 1면 귀퉁이에 조그맣게 나온 내 뒤통수를 보더니 낄낄거리며 웃었다. 얼마 전 부천에 신혼 살림을 차린 동기놈한테는 콩나물협동조합에 가입해 육아일기나 교육 칼럼(현직 교사다) 같은 걸 써서 투고하라고 했다.
집에 들어와 <콩나물신문>을 어머니한테 보여드리니 1면 귀퉁이 내 뒤통수를 보시고는 역시 호호호 웃으셨다.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 웃게 만들 수 있는 기사를 쓰면 아마 온 부천 사람들도 웃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나물신문>은 지역언론이기도 하지만 협동조합언론이기도 하다.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지역언론은 기존 언론의 테두리 안에 속해 있으면서 거기에 '지역색'이 덧씌워질 뿐이지만, 협동조합언론은 독자의 '알 권리'보다는 '알릴 권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역언론을 넘어 기존의 '언론'과도 다르다.
<프레시안>이 협동조합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고 하지만, 거긴 이미 자리가 잡힌 지 한참 지나고 나서 협동조합으로 바뀌었다. 조합원들끼리 이런저런 활동을 벌이는 듯하지만 막상 조합원이 쓰는 기사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콩나물신문>은 그렇지 않다. 조합원이라면 누구나 편집회의에 들어와 '개드립'을 칠 수 있다. 기사거리를 막 던질 수 있다. 어떻게 신문을 만들고 싶은지 자기만의 꿈과 계획을 늘어놓으며 편집회의를 얼마든지 어지럽고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온갖 고민과 발상과 상상력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에서 2주에 한 번씩 힘들게(또는 신명나게?) 찍어내는 신문이 바로 <콩나물신문>이다.
기존 언론들은 왜 '작고 좁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까지역언론의 '지역색'은 단순히 그 지역 소식들을 왕창 싣는다고 해서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는 누가 살까? 사람이 산다. 모든 지역에는 사람이 살고 사람의 삶이 있다. 지역색을 갖추려면 우선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풀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지역에서 살고 있는지를 다루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물론 그 다음 문제라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콩나물신문>은 부천 신문이므로 부천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부천 지역언론이 아닌 다른 신문들은 그것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콩나물신문>이 하는 것이다. 남들이 이미 다 해놓은 걸 우리가 따라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즉 부천에 있는 언론이라서 자동으로 지역언론이 되는 게 아니라, 지역언론을 표방했는데 우연히 그 지역이 부천이어서 부천 지역언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역언론을 표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언론들은 '크고 넓은 이야기'만 하지 좀처럼 지역의 '작고 좁은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고 좁은 것에 확대경을 들이대 다시금 크고 넓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지역언론의 역할이다. 왜 그 역할을 해야 할까? 거듭 이야기하지만 기존의 언론들은 그걸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고 넓은 이야기를 지역의 현실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건 지역색을 갖추기 위한 준비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지역색이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다다라야 할 목표는 기존의 언론들이 되풀이해온 방법론을 뒤집어 엎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몰려 있는 이른바 '메이저' 언론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을 굳이 지역색이라 부를 필요가 없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부천의 쌍용차 매장이나 자동차 부품 만드는 공장에 가서 정리해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건 결국 기존 취재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문제를 다루기 위해 부천의 송전탑 주변에 사는 주민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세월호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등학생 자녀를 둔 이들을 취재하는 것도 결국엔 똑같다.
독자를 언론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로 만드는 '알릴 권리'그렇게 해서 얻어낸 대답들은 사실 지역색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색깔이다. 지역색이란 '그 사람'들의 색깔을 모자이크처럼 다닥다닥 붙여 큰 그림 하나를 만드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색과 지역 주민들의 의견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는 모든 시도는 지역색이란 것을 갖추기 위한 밑바탕을 다지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지역색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역색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앞서 '알릴 권리'라고 말한 것이 그 단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언론이 자신에게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려주길 바라며 때로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까지 머릿속에 쑤셔넣어 주길 바란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으면 '알 권리'라고 대답한다. 알 권리는 결국 '주는 대로 먹을 권리'이고 '먹은 다음 침묵할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알릴 권리는 다르다. 언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알릴 권리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언론에 담긴 내용을 소비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지역 소식을 전하거나 지역 주민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언론에 대고 직접 이야기한다면 언론 소비자와 언론 생산자의 경계는 와르르 무너진다.
<오마이뉴스>가 오래전에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시민기자 제도가 그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만 <오마이뉴스>는 어느 지역에만 한정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언론이다. 어느 지역에서 살든 상관없이 누구나 기사를 올릴 수 있고 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크고 넓은 이야기와 작고 좁은 이야기가 뒤섞여 있으며, 크고 넓은 이야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지역언론은 그와 반대로 크고 넓은 이야기는 과감히 버리는 언론이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크고 넓은 이야기보다는 작고 좁은 이야기가 더 비중이 커야 지역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작고 좁은 이야기를 기자 몇몇이 돌아다니며 취재한 뒤 기사로 쓰는 방식보다는 작고 좁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몸소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것으로 내용을 채우는 방식이 기존 언론들의 방식을 더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
'기자'와 '조합원'을 갈라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그렇다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대체 왜 기존 언론들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려야 하는가? 기존 언론들의 방식을 똑같이 흉내낸다는 것은 곧 기존 언론들의 끄나풀이 되려고 애쓰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려면 기존 언론의 지역 지부를 만들면 되지 굳이 왜 지역언론을 만드는가? 기존 언론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직접 말하게 만들되, 작고 좁은 이야기에서 '좁은'에 해당되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인공을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지역언론의 핵심이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내용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언론을 만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틀이 필요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콩나물신문>에서 실험하고 있는 협동조합언론이다. 출자금과 조합비를 내고 조합에 가입한 조합원이라면 누구나 편집회의에 참여할 수 있고 기사거리를 제안할 수 있으며 기사도 쓸 수 있다. (심지어 신문도 원하는 곳에 직접 배포할 수 있다.)
이건 어쩌면 군사독재 시절을 뚫고 나온 <말>지 창간과 국민주주가 중심이 된 <한겨레> 창간,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시스템 확립과 더불어 한국언론사에 기록돼야 마땅할 혁명적인 사건일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지역언론이라는 것을 순전히 내 마음대로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은 이 글이 <콩나물신문> 조합원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논란거리가 될 수도 있고 껌처럼 질겅질겅 '씹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이 언제나 정답이 되는 공간이라면, 또는 누군가 말한 것이 늘 옳은 것이 되는 공간이라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해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정해진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콩나물신문>을 만드는 가장 큰 재미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조합원들이 활발히 참여해 사실상 '기자'와 '조합원'을 갈라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언제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미 실험은 시작되었고 천릿길을 가기 위한 첫 발짝도 이미 디뎌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