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배를 탔다. 막배는 바다로 잠자러 들어가는 해와 무심하게 다시 밤을 맞이하는 섬 사이를 습관처럼 스쳤다. 갑판에 섰다. 노스탤지어도 없고 그리움도 없는 바람은 칼날보다 예리했다. 나잇살로 퉁퉁 부어오른 심술궂은 볼은 몇 번이고 베어졌다. 초라한 비명과 함께 서해로 던져지는 내 욕망의 주검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해와 섬을 묶어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고 싶었다. 모든 게 정지되면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멈춰버린 우주 한복판에서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사주팔자나 운명 따위를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막배는 항해를 멈추지 않았고 나는 수평선에 눈만 걸친 해를 따라 병풍도에 들어왔다. 얼굴이 반쪽이 된 달이 마중을 나왔다. 병풍도(屛風島)는 섬 서북쪽 끝 해안선 절벽이 병풍처럼 보인다 하여 병암도(屛巖島)라 불리다가 일제시대부터 '병풍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님과 달님이 교차하는 어중간한 시간의 섬.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오후도 아닌 저녁도 아닌 시간에 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걷는 것뿐이었다. 병풍도는 한국에서는 가장 긴 노둣길을 지닌 섬이 아니었던가.
섬에는 썰물 때만 드러나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바로 노둣길이다. 오로지 하루에 두 번, 달님이 내어준 시간을 따라 생겨나는 길, 노둣길. 이 길을 따라 하루에 두 번 섬과 섬 사이로 사람이 오가고, 사연이 오가고, 쌀이 오가고, 소금이 오간다.
병풍도는 모두 네 개의 노둣길로 이웃 섬들과 이어진다. 병풍도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섬인 대기점도까지의 노둣길은 975m. 대기점도에서 소기점도까지는 217m, 소기점도에서 소악도까지는 337m이다. 그리고 병풍도에서 신추도로 이어진 노둣길의 길이는 210m이다. 이 노둣길의 총 길이는 1739m로 한국에서 가장 길다.
대기점도로 향하는 노두로 길을 잡았다. 조금씩 어둑해지는 길에서 바라보는 섬의 풍경은 흐릿했다. 소악도 노둣길에서 소기점도를 바라보면 더욱 선명해진다는 거북바위 형상을 찾아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에 놓인 노동의 흔적은 선명해졌다. 김 양식을 하는 지줏대가 솟대처럼 우뚝 솟아 김밭의 넓이를 어렵지 않게 가늠케 했다. 그리고 밀물에 들어왔다가 썰물에 빠져나가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만든 둠벙 모양의 독살이 그물코보다 촘촘하게 덫을 놓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섬은 노동하는 인간의 대지이자 바다이다. 섬이 외로운 것도 노동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고, 섬이 덜 외로운 까닭도 노동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섬에서 외로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두어 시간 노둣길을 걸었더니 한기가 드세졌다. 냉병이 다시 도지는 듯 했다. 섬에 하나뿐인 민박집에 몸을 뉘였다. 옆방엔 막일하는 육지사내 둘이 들었다. 두렁에 빠진 트럭 꺼낸 얘기가 판자벽을 타고 생중계됐다. 심야전기로 때는 판넬이 기분 좋게 지글거렸다. 목청 좋은 사내들 코고는 소리도 흐물거려지고, 추위에 얼었던 몸도 흐물거렸다.
도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등장인물과 시점만 달라졌을 뿐인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뻘등을 타고 전해졌다. 짐짓 긴장한 음색으로 몇 마디 응대를 하고선 배를 깔고 누웠다. 담배 찌든내가 장판에서 훅 올라왔다. 새마을 봉초를 말아 피던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