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뜬 목도리는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을 걸.""맞아. 실만 아깝게 버리게 될 게 뻔해."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보낼 노란 목도리 뜨기를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이랬다.
"엄마가 안 해서 그렇지 손재주가 있어서 목도리도 잘 뜰 수 있거든."아이들은 내 말을 못 믿겠다며 키득거렸다. 괘씸한 녀석들. 내가 저 녀석들 때문이라도 보란 듯이 목도리를 완성해야지.
지난 가을, 우리 동네 작은도서관 바느질 동아리 회원들은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노란목도리'를 떠 유가족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아홉 개의 목도리를 완성해서 유가족 심리 지원센터인 '안산온마음센터'에 연락했다. 어디로 보내면 될지 묻기 위해서였다. 당시 '온마음센터'는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던 중 작은도서관의 연락을 받고 반가워했다.
재주 없는 내가 노란 목도리에 도전하다
센터는 노란목도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노란목도리 나눔 캠페인'을 추진했다. 그리고 100개의 뜨개질 세트를 마련해서 원하는 곳에 보내 주었다. 우리 동네 작은도서관에도 10개의 세트가 왔다. 처음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엔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 뜨개질 세트를 받았다. 그렇게 내 인생 첫 목도리를 뜨게 되었다.
내가 할 줄 아는 뜨개질은 겉뜨기, 안뜨기뿐이었다. 변형고무뜨기를 분명히 바느질 잘하는 엄마에게 배웠는데도 집에 와서 하려니 새롭기만 했다. 인터넷 동영상을 계속 플레이 하면서 떴다. 꽤 잘 떠진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몇 단을 더 뜨고 보면 중간에 구멍이 뻥. 다시 풀었다. 그러기를 수차례. 손 때 때문에 목도리 시작 부분이 꼬질꼬질해졌다. 매일 조금씩 뜬다고 떴지만 세 타래나 되는 실을 손도 빠르지 않은 내가 언제 다 뜰지 걱정이 되었다.
괜히 뜬다고 한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겨울 다 지나고 완성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마음과 달리 뜨개질이 지지부진하던 날, 고등학생 아이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엄마, 나한테는 북유럽이 딱 맞는 거 같아. 한국의 경쟁 교육은 정말 문제가 많아."아이는 우리 교육이 얼마나 문제인지 근거를 대며 이야기했다. 그런 아이가 난 기특했다. 그런데 날 선 비판이 계속될수록 좀 걱정이 됐다. 아이 모습에서 현실엔 발 담그지 않고 비판만 하는 사람의 모습이 겹쳐졌다. 난 실천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아이는 내 말에 기분이 상했다.
"그러는 엄마는 우리 교육을 바꾸기 위해서 뭘 했는데?"기가 막혔다. 내가 한 일이 없다니. 난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대안학교를 만들었는데. 내가 선 자리에서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는 동안 주말이면 공사를 하고 청소와 회의를 했다. 아이가 초등 4학년 때 더는 재정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일반 학교로 옮겼다. 그런 나에게 아이는 '엄마는 뭘 했느냐?' 묻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아이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 말이 다 틀린 건 아니다. 대안교육도 공동육아도 내 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 일이 좀 더 넓은 아이들에게 확장되었다고 단언을 못 하겠다. 우리나라 교육을 바꾸려면 일반 학교를 바꾸는 일에 뛰어들었어야 한다. 아이의 지적은 틀리지 않다. 아이는 내 뒤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말을 안 했을 뿐.
시간이 흘렀을 때 아이는 어쩜 나에게 물을 것이다. 엄마는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어? 말을 안 해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정치권이 알아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일은 저절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오싹하다.
뭐든 해야 한다. 내 바로 뒤에서 지켜보는 아이가 무서워서라도. 목도리를 다시 열심히 뜨기 시작했다. 기회가 닿으면 안산에도 방문해야겠다 생각했다. 목도리를 식당에도 버스에도 모임에도 들고 다니면서 떴다. 만나는 사람들이 무슨 목도리냐 물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보낼 목도리라 이야기했다.
제법 꼴을 갖춰가는 목도리를 보면서 아이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아직 바늘이 달린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거울을 보며 한 마디를 했다.
"엄마, 이 목도리 어디 보낸다고 했지?""세월호 유가족.""아, 그랬지. 거기만 아니면 내가 달라고 할 텐데. 엄마, 다음번엔 내 것도 떠 줘."엄마가 하는 일이면 하나 같이 무시하더니 목도리가 완성이 돼가니 탐이 나나 보다. 다행이다. 목도리를 다 뜨고는 마무리할 줄 몰라 집에 놀러 온 동네 엄마들에게 도와 달라 부탁했다. 코바늘로 늘어진 줄을 넣어준 엄마도 있고 목도리를 끝을 마무리해 준 엄마도 있었다. 엄마들은 "그런 줄 알았으면 나도 하나 떠줄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하나의 목도리에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였다. 이런 마음들이 유가족에게도 전해진다면 좋겠구나 싶었다.
10명만 모여도 움직인다는 세월호 유족
그리고 지난 15일 안산에 갈 기회가 생겼다. 노란 목도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안산 온마음센터'에 들렀다. '노란 목도리' 담당자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유가족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목도리 회수율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요. 여러분들이 목도리를 뜨면서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주시는 그 과정 자체가 소중한 것이니."그 말을 듣는데 코끝이 싸해졌다. 내가 목도리를 뜨면서 사람들과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기억을 하고 마음을 모으는 그 과정을 모두 알고 계셨구나.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 소중할 만큼 유가족들이 외로우신 건가?
"지역에서 모임이 있을 때 센터에 연락을 주시면 부모님들이 설명회를 나가시기도 해요. 10명만 모여도 가니까요. 연락 주세요."센터 직원이 말했다. 부모님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간절한 마음이면 지역에서 10명만 모여도 세월호 참사와 진실 규명 실황에 대해 설명하러 간담회에 온다는 걸까? 온마음센터를 나와 버스를 탔다.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뜬 노란목도리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 데리고 안산에 꼭 다시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