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인천지하철1호선 계양역에 내려 경인아라뱃길을 건너기 위해 계양대교를 넘으니 일렉트릭 기타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대교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 문을 열자마자 기타 연주자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노풍호(65)씨였다. 1970년대 '마음 약해서' 등의 히트곡을 남긴 그룹사운드 '들고양이들'에서 10년간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그의 인생역정은 아라뱃길을 흐르는 물만큼이나 어두웠다.
야외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싸락눈이 점점 굵어지자 실내로 옮겨 이어갔다. 그는 자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연을 처음 만난 이에게 2시간 동안이나 쏟아냈다. 초로(初老)에 접어든 그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얘기를 줄곧 했다.
까막눈이지만 노래 멜로디는 선명하게 들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충남 대천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즈음(년도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함)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라, 학교는 중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 다니다가 그만 뒀어요.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팔자려니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취미생활이나 하려고 기타를 쳤죠"서울로 오기 직전 대천에 있을 때, 동네 형이 자신이 치던 기타를 노씨에게 줬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기타를, 그때부터 무슨 보물인양 끼고 살았다.
아무도 그에게 기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라 부모의 구박을 받으며 십여 년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그에게 악보는 '흰 것은 종이요, 검은 줄과 콩나물은 그림'일 뿐이었다.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무작정 기타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실력을 알아봐주는 이들이 생겼다.
"야간에 술을 파는 업소에서 밴드를 하던 형들과 한 동네에 살았어요. 한번은 저를 보자고 하더니 꽤 잘 한다며 악보를 내밀더라고요. 악보는 볼 줄 모르고 그냥 소리를 듣고 친다니까, 이해를 못합디다."그 선배들을 따라 야간업소에서 몇 년간 일하면서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어떤 사람의 소개로 TBC(동양방송, KBS의 전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연주했다. 그 일을 계기로 당시 인기 절정 그룹이었던 '들고양이들'에 합류했다.
화려한 무대, 그러나...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연주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순박한 마음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원통합니다. 착하게 열심히만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같이 살았던 거지요."밴드 멤버들과의 불화는 경제적 타격으로까지 이어져 공연 수익금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 비싼 악기와 장비를 감당하는 것도 벅찼다.
"국문도 겨우 깨친 제가 영어로 써 있는 악보를 보는 건 불가능했죠. 그때 저는 거의 외워서 연주를 했는데, 공연 전 리허설 때 조금이라도 틀리면 악단장이 제게 심한 욕설을 했어요. 자존심이 상하는 건 기본이고 울화병으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그렇게 십 년을 버티다 밴드를 나왔다. 실력이라면 누구와 겨뤄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 동기가 많아요. 실력이 없어서도, 돈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못 배웠다는 것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한이 돼 지금도 억울해 잠이 안 와요. 눈물이 날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얘기합시다."본업은 운수업이지만 음악생활은 내 인생
밴드 활동을 정리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노씨는 1톤 트럭으로 운수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그리움으로 부업으로나마 연주를 계속했다. 잔칫집을 돌아다니며 흥을 돋워주는, 이른바 '행사'를 뛴 것이다. 본업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는 노씨는 3년 전에 그 일도 접었다. 그냥 그만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뒤 경인아라뱃길변 공원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이 근처 계양구 장기동에 살아요. 일요일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곳에 나와 연주합니다. 누구한테 봐달라거나 사람들을 모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사실 지나가는 사람들 없이 조용히 혼자 있었으면 좋겠어요.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연주할 수 없으니까 바람도 쐴 겸, 또 손이 굳으면 안 되니까 나오는 거지요. 산책 나온 사람들이 제 소리를 듣고 반응을 보이는 게 고맙고 즐겁습니다."어떤 가족은 음식을 준비해와 노씨가 공연하는 장소 앞에 돗자리를 펴기도 한단다. 좋은 곡을 들려주는 그를 위해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가끔 시끄럽다고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호응이 좋다고 한다.
"음료수나 담배를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술대접을 하려하거나 어떤 사람은 10만 원을 주기도 했어요. 절대로 안 받습니다. 그래도 주시려고 하면 공연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노인들이 5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뽑아다주는 건 안 받을 수 없더라고요."한 많은 인생 봉사하며 살고파'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그거라 취미생활로 하고 있다'는 노씨는, 취미생활로만 하기 아까워 작년부터 재능기부로 음악봉사를 하고 있다.
"독거노인이나 무의탁노인, 장애인복지관, 요양병원 등에서 자원봉사를 합니다. 지금까지 열 번 정도 다녔는데 호응이 좋아요. 처음엔 어색했는데 좋은 일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편해지더라고요. 한두 번 하다 보니 반응이 좋아 여러 곳에서 요청이 오기도 했습니다."한번은 서울 강서구에 있는 요양원에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노인들이 노씨의 공연을 보러 아라뱃길 공연장까지 전동휠체어를 타고 오기도 했단다.
"기타를 배우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한도 많지만 어차피 고생하면서 배운 거니까 남은 인생 취미생활도 하면서 봉사하면서 살고 싶어요. 남은 꿈은 그거밖에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