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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타계 9주년을 맞은 백남준이 세계 굴지의 뉴욕 가고시언갤러리(미술파워 세계 8위) 전속작가가 됐다. 작고한 작가 중에는 드문 예이다. 백남준은 최근 학고재갤러리 백남준 전에서 TV로봇 '톨스토이'가 4억5000만 원에 팔려 관심을 끌었다. 199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회고전'에서 일어났던 그 열풍이 다시 부활할까. - 기자의 말

백남준, '고슬리 황제반지'상 수상

백남준 I '톨스토이(Tolstoy)' 복합매체(Mixed Media) 131×86×40cm 1995. 이 작품에 모 갤러리에서 4억 5천에 팔리다
 백남준 I '톨스토이(Tolstoy)' 복합매체(Mixed Media) 131×86×40cm 1995. 이 작품에 모 갤러리에서 4억 5천에 팔리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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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89년 '쿠르트 슈비터스'상에 이어, 1991년에는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을 탄다. 그의 전성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 이후에도 수상은 이어진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상, 1998년 '토머스 크렌스'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들을 휩쓴다.

1991년에는 독일 <캐피털>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작가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뒤셀도르프와 오스트리아의 빈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 바젤 등에서 성공적으로 '유럽초대전'을 마친다.

1992년 과천국립전시로 백남준 열풍이 불다

백남준 I 북경원인 각종 전자기기 부품, 알루미늄, 철, 플라스틱, 램프 2, 14인치 컬러TV 2대, 8인치 컬러TV 3대, 레이저디스크 1대, 디스크 플레이어 1대, 150×178×72cm 1992. 1992년 과천국립미술관 백남준 회고전 때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백남준 I 북경원인 각종 전자기기 부품, 알루미늄, 철, 플라스틱, 램프 2, 14인치 컬러TV 2대, 8인치 컬러TV 3대, 레이저디스크 1대, 디스크 플레이어 1대, 150×178×72cm 1992. 1992년 과천국립미술관 백남준 회고전 때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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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백남준은 성공적인 유럽 전시를 마치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백남준, 비디오 때·비디오 땅'전이라는 제목으로 7월 30일부터 9월 6일까지 대중과 만났다. 대회고전이자 회갑전이다. 이때 한국 관객들은 미디어 아트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백남준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이 전시를 본 조영남도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 당시를 한국 미술에 혁명의 불씨를 댕긴 해로 회고했다. 그 특별한 해 김홍희·이용우씨 등이 백남준 관련 서적을 냈다. 그를 오래 지원한 정기용 관장이 운영하는 '원화랑'에서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30년 회고전'도 열렸다.

당시 1992년 8월 12일 자 KBS뉴스 영상자료를 보면 과천미술관 메인홀에는 경기중학교 스승인 안병무 선생 등의 관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TV정원, TV물고기, TV촛불, TV조각 김유신 장군이 등장한다. 유치원 동창인 이경희 여사와 함께 찍은 큰대문집 영상과 요셉 보이스가 퍼포먼스에서 찍은 영상이 대형 비디오 화면에 등장한다.

또한 그의 전시에서 항상 보이는 특징 중 하나가 '한국적인' 주제이다. 예컨대 제사 때 쓰는 놋그릇과 지게 등으로 만든 설치 미술이 그렇다. 세종대왕 때 해시계·물시계·혼천의(천체관측기) 등을 발명한 장영실과 관련된 작품도 눈에 띈다.

이 전시 부대행사로 '현대미술 세기의 전환 20~21세기 국제 심포지엄'이 1992년 7월 30에서 8월 1일까지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백남준 연구가인 장 폴 파르지에 교수 외 이용우·유홍준·서성록·송미숙·윤범모·정영목·김홍남·김홍희 등이 참석했다.

한국에서 첫 퍼포먼스 선보이다

1992년 8월 문예회관대극장에서 백남준이 퍼포먼스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 이창훈.
 1992년 8월 문예회관대극장에서 백남준이 퍼포먼스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 이창훈.
ⓒ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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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백남준은 1992년 '춤의 해'를 맞아 김현자의 춤과 함께 새로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해 8월 한국문예회관(현 아르코미술관) 대극장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비디오 소나타'라는 퍼포먼스가 공개됐다. 공연장이 변경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백남준은 비디오를 마이크처럼 잡고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가 어떻게 영상이 되는지 관객에게 실감 나게 보여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남준의 멘토였던 존 케이지가 1992년 8월 12일 타계한다. 주변에서 백남준에게 그가 어떤 분이었냐고 궁금해하자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으로, 난 독일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케이지를 만나 경쾌한 해방감을 느끼며 숨 쉴 수 있었고 미국에도 예술이 있다는 걸 그를 통해서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백남준은 또 "세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며 "서양 게임의 룰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라"고 했다. 이는 당시 통념을 깨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지구의 중심이 '서'에서 서서히 '동'으로 올 것이라 예언한 것이다.

백남준과 사진 인연 맺은 '이은주'

백남준 1주기 추모 이은주 사진전 포스터
 백남준 1주기 추모 이은주 사진전 포스터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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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의 해'를 계기로 백남준 사진을 찍게 된 사진가 이은주씨는 초상권도 얻어 냈다. 그녀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92년 문예회관에서 백남준 리허설이 있었는데 기자들이 몰려왔는데 플래시가 방해라며 기자들에게 그만 찍으라고 해 다들 돌아갔는데 난 그날 그럴 수 없었다"며 "선생님을 제 사진 리스트에 꼭 넣고 싶어서 무대 뒤에 올라가 몰래 사진을 찍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찍은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어 드렸더니 백 선생이 사진가의 사진 선물을 받기는 처음이라며 좋아했어요. 왜 제 사진에 백남준을 꼭 넣고 싶었냐고요? 그 이유는 파격적 그의 퍼포먼스가 한눈에 봐도 천재성이 번뜩였고요. 또한 그 당시 전 세계 유명한 큐레이터들이 그에게 다 몰려오는 걸 보고 실감했어요."

철학자 김용옥, 백남준을 찾아가다

1992년 백남준 회고전이 있다는 걸 알았던 도올 김용옥은 1992년 백남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고 그 내용이 그의 저서 <석도화론>에 남아있다. 그 중 유명한 백남준의 말은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이다. 이는 한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서구주의의 극복을 강하게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용옥 선생은 그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을 의심할 바 없이 위대한 예술가로 봤고 또한 독창적 상상가로 받아들였다. 복잡해 보이는 작품 속에 담긴 구체성, 그 깊은 속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발견했다.

당시 전시에는 <작가와 대화>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대강당에서 있었다. 백남준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관객이 많았단다. 이 장면을 보고 도올 선생은 질문 방식이 정연한 것이 무작위한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 보니 그런 선입견이 다 깨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날 관객의 기지 넘치고 수준 높고 질문에 탄복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적고 있다.

그중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누가 "우리 미술학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백남준은 "한국 민족은 <삼국유사>에서 보듯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나 미국에서 '한국 미술 5천년전'이라고 해서 가 보니 한국의 판타지는 다 죽여 버리고 맨 중국적인 것만 진열해 놓아 매우 서운했다"며 "한국 민화의 컬렉션이나 해석에서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앞지르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더 흥미로운 질문이 쏟아졌다. 누가 "당신에게 예술은 뭔가?"라고 물으니 백남준은 "지금 내게 예술은 돈을 벌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자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앞 질문들 너무 어렵고요, 전 미술시간에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느냐"고 질문했다. 백남준은 "그래 아무생각 없이 그리는 게 최고의 그림이야, 아무쪼록 생각 없이 그려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절대 선생님 말씀을 듣지 마라"고 대답해 또 다시 관중의 마음을 잡았다.

1992년 8월 16일 아침 호텔에서 백남준을 만난 도올 김용옥 선생이 그를 인터뷰하는 모습.
 1992년 8월 16일 아침 호텔에서 백남준을 만난 도올 김용옥 선생이 그를 인터뷰하는 모습.
ⓒ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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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도 질문했다. "당신은 나처럼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공부벌레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박식한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백남준은 "난 당신처럼 그렇게 심각한 공부나 독서를 하지 않는다"며 "내 지식원은 대강 '신문'이다"고 답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 <뉴욕타임스>만 잘 읽어도 한국 학자들 서재에 쌓인 책 정보보다 더 명료한 세계사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3대 정보탱크는 '슈피겔(독일신문)-미정보국(CIA)-미쓰비시'이다."

과천 회고전 대표작, '나의 파우스트(연작)'

백남준 I '예술' <나의 파우스트> 13개 연작 중 한 작품. 8채널(FAUST CHANNEL 8_ARTS) 127×81×226cm 1991-1992
 백남준 I '예술' <나의 파우스트> 13개 연작 중 한 작품. 8채널(FAUST CHANNEL 8_ARTS) 127×81×226cm 1991-1992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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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992년 백남준 회고전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때 그의 대표작은 유럽에서도 큰 호응을 받은 '나의 파우스트(My Faust)' 연작이었다. 유럽의 기품 넘치는 고딕성당 같은 모양을 한 이 작품은 교육·농업·통신·정보·종교·건강·경제·환경·예술·인구·운송·자서전·국수주의 등의 제목이 붙어 있고 13개의 연작으로 되어 있다.

'예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위 작품은 유럽 순회전 때 선보인 작품 중 하나이다. 25개 모니터가 배치되어 있고 3개의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사용해 주제와 연관된 이미지를 콜라주 했다. 그리고 음악과 문학과 조각 등과 관련된 오브제를 부착했다.

또한, 이 작품명에 어울리게 밑에는 '피아노'가 위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책도 보인다. 백남준은 공간예술에 시간과 역사라는 맥락을 도입하여 TV조각으로 바꾼 것이다. 작품 뒤를 보면 복잡한 전기선이 연결돼 있는데 그야말로 첨단예술품이다.

<작가와 만남>에서도 위 작품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한 사람이 "이 작품은 유럽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트에서 영감을 받은 건가요?"라고 묻자, 백남준은 "정확하다"고 답했다.

"처음 유럽에 가서 그들의 음악과 미술 수준에 너무 실망했고 르네상스 이후 실물이 초라하게 보였으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만은 내게 신비로운 감동을 줬다. 빛이 반사되는 게 아니라 빛이 투과되어 볼 수 있는 건너편에 있는 게 좋았다."

초대형 '거북', 미디어 아트로 과시

백남준 I '거북(Turtle)' 166개 TV모니터 150×600×1000cm 1991-1993
 백남준 I '거북(Turtle)' 166개 TV모니터 150×600×1000cm 1991-1993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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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 시기에 만든 TV조각 '거북'을 감상해 보자. 거북은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인데 작품 규모가 너무 커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무려 166개의 TV모니터를 사용한 가로 10미터-세로 6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비디오 작품이다. 관객을 압도한다.

거북은 십장생 중 한국인에게 장수·영생·다산을 표상하는 영험한 동물이다. 여기서는 그런 고전적 이미지가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클립이 난무하며 무수한 모니터가 동시다발적으로 빛을 뿜어낸다. 찬란하고 경이로운 이미지다. 백남준의 위력이 느껴진다.

이것은 기존의 회화나 조각이 비디오아트와 어떻게 다른지 가시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 콘텐츠의 질과 양에서도 그렇지만, 이런 미디어의 표현력이나 스토리텔링 능력에서 기존의 방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부하다.

작품의 규모가 크다 보니 뭐든지 담을 수 있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물론이고 과학과 예술, 인간과 자연, 동서양의 문물 등의 분야가 포함된다. 요즘 디지털 영상 세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시각만 아니라 오감으로 만지고 느낄 수도 있다.

각양각색의 빛과 색채와 형태와 움직임이 그야말로 장대하다. 기존 예술의 범위를 뛰어넘는 '메타 아트'이다. 눈앞의 일상에 얽매여 사는 우리에게 호연지기를 되찾게 해주고 큰 감흥을 일으킨다. 이상과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태그:#백남준, #존 케이지, #이은주, #김용옥, #92년 백남준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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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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