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버지 생신이여서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었습니다. 예전에는 일상이었던 '같이 밥 먹는 일'이, 성인이 되고 각자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시간을 내야 겨우 이뤄지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대가족도 아닌 겨우 다섯 식구가 모이는 일인데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은 몰라도 부모님 생신엔 꼭 만나서 밥 한 끼 먹기로 삼남매가 뜻을 모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성사된 식사 자리였습니다.
엄마는 아침부터 서둘러 음식을 장만하시느라 힘들셨을 텐데,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게 그리도 흐뭇하신가 봅니다. 잘 먹는 삼남매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둘러 앉아 같이 밥 먹는 게 얼마 만이냐"는 말을 시작으로 케케묵은 옛날 얘기를 꺼냅니다. 그 얘기는 어느덧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갔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그즈음 부모님이 모두 일을 하셔서 두세 살 터울의 두 남동생을 돌보는 건 늘 제 책임이었습니다.
"동생들 잘 챙겨.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알았지? 그리고 너희는 누나 말 잘 듣고. 엄마 아빠 없을 땐 누나가 어른이야. 알지?" 우리 삼남매가 아침마다 듣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님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이렇게 지내서인지 저희 삼남매는 지금까지도 우애 좋게, 서로 위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30분간의 추격전'그 시절 저는 내성적이지도 않지만,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주로 집에서 놀았습니다. 반면 동생들은 남자아이들과 집 앞 공터에 나가 놀다 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다급하게 누나를 부르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내다보니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동생들의 얼굴은 물론 머리카락과 옷이 젖었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어떤 나쁜 형이 우리한테 물총 쐈어!" 그 얘기를 하는 동생들은 집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저는 동생들의 손을 잡고 녀석들이 말한 나쁜(?) 형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누가, 내 동생들한테 물총 쐈어?" 아무 잘못없는 동생들을 괴롭혔다는 데 화가 난 저는, 크게 소리부터 질렀습니다.
"저 형이야, 누나." 동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저보다도 한두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애였습니다. 순간 저는 방금 큰소리친 건 잊고 멈칫했습니다. 그 남자애가 저를 쳐다봅니다. 마치 '넌 뭐냐'는 눈빛으로. 저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엔 저를 바라보는 동생들이 있습니다. 누나가 이 악당(?)을 당당히 무찔러 줄 거라 믿는 녀석들의 눈빛이 느껴집니다.
저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모르는 사람과 큰소리를 내며 싸운 적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저보다 더 큰 남자애랑 싸우는 건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큰소리를 쳤습니다. 동생들과 맞잡은 손을 더욱 꼭 잡고 말이죠.
"너야? 네가 내 동생들한테 물총 쐈어? 너도 물총 맞아 볼래? 쪼그만 애들을 왜 괴롭혀?"그러면서 저는 점점 그 남자애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놀란 남자애가 뒷걸음질을 칩니다. 자기보다 더 자그마한 여자애가 큰소리치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습니다. 네, 그건 분명 무서워서가 아니라 놀래서였습니다. 그 아이는 급기야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질세라 저도 그 아이 뒤를 쫓아 뛰었습니다.
그 아이와 저는 거의 30분간 추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멈추지 않자 결국은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가버렸습니다. 그러면 끝날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저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야, 너 나와! 비겁하게 도망치냐?" 용기에서 자존심까지저는 그 남자애 집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어른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무슨 사연인지 대문을 열지는 않아서 저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잠깐의 정적 후,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며 자신이 아들을 혼낼테니 이만 돌아가라며 사과했습니다. 이후 아들을 혼내는 엄마의 성난 목소리를 배경 삼아 저는 동생들 손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께 그 일을 얘기했습니다. 아니, 아마 자랑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겁니다. 부모님은 잘했다고 하시면서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마 동생들 잘 돌보라고 하셨지 않느냐며 웃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 웃음은 부모님께 칭찬 받은 게 기분 좋아서였습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그건 용기라기보다는, 제 인생 최초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나가 자기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 동생들 앞에서 기죽을 수 없었던, 누나로서의 또 엄마가 말씀하신 '어른'으로서의 자존심 말입니다.
그날 그렇게 자존심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지켜낸(?) 자존심 덕분에, 동생들은 아직도 엄마로부터 그날의 그 추격전 에피소드와 함께 누나한테 잘하라는 당부를 들었습니다. 그땐 미처 알지도 못하고 지켰던 자존심이, 지금은 저보다 더 훌쩍 커버린 동생들 앞에서 여전히 저를 든든한 누나로 만들어줘서 다시 한 번 어깨가 으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