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한테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물을 해주지 않으련? "클레르는 내가 또 뭔 더 요구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선물이 뭔가 하면 말이지, 요 어린 학생이 나한테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선물이야" 아이는 그의 슬픔 저 밑바닥으로부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는데 그의 입술에는 다정하고 아주 참한 미소가 피어났다. -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 중에서
작고 어여쁜 마을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다른 이들은 어느 때에 여행을 가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먹먹해지는 일상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나를 잊고 좀 더 먼 거리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자 할 때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행복이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디딘 듯 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면, 나는 그렇게 자주 캐리어를 챙겨 들으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여행을 시작하는 나의 얼굴은 대체로 미로들 사이를 한참동안 헤매다 체력조차 고갈된 이의 축처진 어깨와 닮아 있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날도 나의 마음은 처음 만나는 거리들만큼 낯설고 팽팽한 긴장의 끈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불쑥 한 작은 생명체가 나타났다. 청바지와 하늘색 가디건을 입은 7살 즈음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입고 있는 옷과 마치 색을 맞추기라도 한 듯 푸른색 계열의 줄무늬가 들어간 공을 땅에 튀기며 내게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통. 통. 통.
비닐로 만들어진 공의 탄력이 그렇게 조용한 골목의 대기 속으로 생기 있게 울려퍼지더니, 갑자기 아이가 내 방향으로 공을 보냈다. 이제 막 처음 본 그 아이가 던진 공을 받아들고 내가 꽤나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도, 아이는 연신 방글 방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뭐하고 있어요? 이쪽으로 공을 던지지 않고. 나와 놀아요. 잠시 이 공간에 있을 때라도 말이죠. 도대체 그 심각한 얼굴은 뭐예요. 날 봐요. 그저 이렇게 웃으면 되는 걸. 별거 아니에요. 자. 당신이 공을 던지면 내가 받을게요. 어서요!!!" 굳이 내게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환한 웃음과 내게서 던져질 공을 받고자 준비하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아이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이제야 알아 들었다는 듯 얼른 공을 던져 주고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싶어서 서둘러 사진기를 어깨에서 내렸다. 그런데 부탁할 필요도 없이 아이가 먼저 공을 허리 옆에 끼우고는 멋진 모델의 포즈로 내 앞에 섰다. 마치 이조차도 그녀에게는 놀이이고 행복을 위해 마련된 시간이라는 듯.
순간 나는 그녀의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미소와 어느 상황에서든 생을 누릴 줄 아는 지혜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작은 생명의 어디에서 그런 놀라운 힘이 나오는 걸까?
길은 내게 학교 같았다. 그러나 이 세상 위에서 가장 자유롭고 수많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학교. 그리고 마치 작가 가브리엘 루아가 실제 그녀의 교사 생활을 소재로 기록한 소설 <내 생의 아이들>에서처럼, 내게도 길 위에서 마주한 아이들은 무척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이 세상과 이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경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스스럼없이 대해주고 잠시나마 친구로서 줄 수 있는 지혜와 지지를 아낌없이 건네주곤 했다.
물론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듯 그들에게도 삶은 결코 녹녹한 것이 아닐 터였다. 7살 아이의 생이 온통 행복 가득한 장미빛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이라면 그는 심각한 기억력 장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인생이란 오롯이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믿어 버리게 된 무시무시한 어른의 얼굴을 지니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은 온통 천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믿음 역시 욕심 많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꾸며진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허구의 이야기이듯.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들은 본인들 나름대로 매우 진지하게 생에 대한 배움을 얻어가며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른들의 세계보다는 훨씬 솔직한 얼굴로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타인을 마주한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그들의 단순함의 속살에는 사실상 그러한 솔직함 때문일 뿐, 어른들의 생각보다 그들은 훨씬 깊게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즐거우면 웃는 것. 아프면 우는 것. 사랑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결코 숨기지 않는 것. 쉽게 상처받는 만큼 작은 일에도 감동할 줄 아는 마음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그런 마음이기에 낯선 이방인의 카메라 앞에서 각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 수 있었던 아이들. 순간의 감정에 보다 솔직할 수 있는 그 맑음으로 내게 보여 주었던 눈부신 미소들. 그리고 그날 저 어여쁜 꼬마 아가씨처럼 세상 그 어느 구도자의 깨달음보다 명철한 생의 지혜들을 가르쳐주었던 아이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걷던 길 위의 그 학교는 깜깜한 밤 하늘을 비추이는 별들처럼 따뜻하게 빛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과의 찰나의 인연과 우정은 너무나 가슴 벅찬 것이었고,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한 선물이었다.
<내 생애의 아이들>에서 클레르는 너무나 가난한 집의 아이였다. 선생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수 없어서 너무나 크게 상처 입어 버린 아이. 그런 클레르에게 선생님은 "요 어린 학생이 그녀에게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그 어느 값비싼 것들보다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알려준다.
혹여 살아있음이 축복처럼 다가왔던 순간들을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길 위에서의 수많은 작은 생명들이 내게 미소 지어주던 그 순간들을 기억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008~2014년 동안 여행 길 위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