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말 받아쓰며 능력 인정받아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부친 윤석오(1912~1980)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권력 지형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한학자였던 그는 1945년 11월의 어느 날 고하 송진우(한민당 수석총무)의 추천으로 돈암장에 머물던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위당 정인보(윤석오의 스승, 초대 감찰위원장)의 친구였던 송진우는 윤석오에게 "여기서 힘든 일을 잘 이겨내면 나중에 큰일을 하게 된다"는 언질을 줬다고 한다. 그러나 윤석오와 이승만의 인연을 맺어준 송진우는 그해 12월 30일 암살당한다.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동안 한국어를 자주 쓸 일이 없었기에 귀국 직후 그의 말투를 받아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석오는 이 부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그의 신임을 얻게 됐다.
윤씨는 이승만이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과 하지 사령관과의 갈등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마포장 시절(1947.8.25~10.18)을 포함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8년간 이승만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아들 윤여준은 마포장 시절에 대해 "이제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끝났다는 얘기가 나오고, 말 그대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이 지은 한시를 윤석오가 강평하고 자구를 고치며 소일하는 나날도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1947년 10월 6일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이 미국과 한민당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승만의 권세가 올라가고 '비서 윤석오'의 위상도 달라지게 됐다.
"이승만의 비서로는 이기붕 윤석오 두 명이 있을 뿐이니"단독정부 수립이 임박한 1948년 4월 3일에는 '이승만 박사 비서실' 명의로 다음과 같은 발표문이 나올 정도였다.
"최근 자칭 이승만 박사 비서라 하고 각 지방으로 다니면서 자기 단체에 유리하도록 선전하고 종종 금품을 요구하는 일이 있다 하는데 이승만 비서가 지방에 간 일이 전혀 없으면 비서로는 이기붕 윤석오 두 명이 있을 뿐이니 일반은 속지 말라."이승만은 특히 초대 내각 구성과 관련된 심부름을 윤석오에게 맡겨 그에겐 '조각비서'라는 별명이 붙었다. 윤씨가 이 대통령에게 "왜 만송(이기붕의 호)을 놔두고 저에게 맡기냐"고 물으니 대통령은 "그 사람한테 혼자 알고 있으라면서 시키면 사흘 후에 그 비밀이 나한테 되돌아 들어오더라. 뒤에 붕당이 있는 모양"이라고 답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친일파와 타협했다는 정치적 비판을 피할 수 없고, 비서 윤석오도 그의 생각을 돌리지 못한 것을 생전에 애석해 했다. 그러나 죽산 조봉암의 농림장관 기용은 당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익들 항의에도 조봉암의 농지개혁 구상 지지 7월 24일 대통령 취임 무렵, 이승만은 윤석오에게 "많은 사람이 조봉암을 농림장관 감이라고 천거하는데, 자네가 한번 만나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농지개혁은 친일파 청산과 함께 해방된 나라가 추진해야 할 국정운영 과제의 핵심이었다.
"선친은 대지주 집안의 장남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소작제에는 비판적이었어요. 토지는 농민들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죽산(조봉암의 호)을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둘이서 얼마나 얘기가 잘 통했겠어요? 선친이 '농지개혁에는 죽산 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보고를 올린 뒤 그분이 정말로 장관에 임명됐어요."8월 2일 1차 조각명단이 발표되자 그 파장은 대단했다. 초대 내무장관에 기용돼 치안을 담당해야 했던 윤치영은 조봉암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 구상을 문제삼아 "장관이 죽산이면 차관이라도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을 앉혀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였다.
인선 발표 다음날 윤석오의 집 앞에는 그를 비난하는 우익인사들이 몰려들었다. 급히 출동한 경찰관이 대문 앞에서 총을 들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광경을 윤여준은 지금도 기억한다.
훗날 윤석오는 "새벽부터 윤치영을 비롯한 여러 유지들이 원남동 집으로 찾아와 욕설에 가까운 원망을 하는 통에 집사람이 아이라도 배었다면 낙태할 뻔 했다"(1958년 8월 14일 경향신문)고 밝혔지만, 그가 당일 퇴근한 뒤 우익인사들의 '행패'에 그는 단 한마디의 말만 했다고 한다.
"미친놈들.."
그러나 윤석오의 기대와 달리 조봉암은 정·관계의 집중 견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 2월 22일 장관직을 사임하고 만다.
인사 문제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갈등1948년 8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은 윤석오를 총무처 차장에 발탁했다. 이 대통령의 보좌진 중에서는 윤치영 내무장관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1998년 행정자치부에 흡수된 총무처는 특히 내각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정부 초창기 공무원 인사를 관리하는 '실세' 부처였다. 5년간 총무처 장관은 4번 바뀌었지만, 윤석오는 차관(차장에서 승격) 자리를 줄곧 지키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경무대 인근(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자리)으로 이사한 것도 총무처 차장에 임용될 무렵의 일이다. 총무처 일과 청와대 일을 함께 하게 됐으니 오늘로 치면 '청와대 인사담당 비서관'이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충청도 출신 윤아무개가 정부 인사 다 해먹는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렸다.
"다 아는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사정에 어두웠죠. 아무개 말 듣고 누구를 임용하자고 하면 선친은 '그 사람은 골수 친일파라서 안 된다'고 해서 반려된 경우도 많았다고 해요. 나중에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영어 잘하는 이기붕·박마리아 부부와 친하다는 걸 알고 그쪽 라인으로 인사 청탁이 들어와서 프란체스카와도 갈등을 빚었죠. 인사 문제로 보고할 게 있어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프란체스카가 '이 박사는 쉬어야 하니 돌아가라'고 몸으로 문을 막아선 일도 있었다고 해요."친일파와 타협한 이승만과 갈등 갈수록 깊어져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인사 기조는 '친일파와의 타협' 쪽으로 굳어져갔다. 1949년 1월 27일에는 국회 반민특위의 지원 속에 총무처 차원에서 각 정부기관 내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령이 나왔지만, 2주 만에 조사는 중지되고 만다.
스스로 조선왕조 양녕대군의 17대 손임을 자랑스러워했던 이 대통령과 윤석오 차관의 갈등도 갈수록 깊어졌다.
윤석오 차관이 1951년 5월 23일 사표를 냈지만 이 대통령은 사표를 반려했다. 이듬해 2대 대통령 선거에서 관권 개입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김태선 내무장관의 후임자를 뽑을 때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이 대통령: 자네는 왜 내가 인사만 하면 안 된다고만 하는가?윤 차관: 두 번 다시는 인사 얘기는 안 꺼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임명하시려는 이 분은 안 됩니다(생전의 윤석오는 그가 막으려고 한 인물을 밝히지는 않았다).이 대통령은 결국 뜻을 굽혔고, 내무장관 자리는 당시로서는 의외의 인물이었던 진헌식 충남지사에게 돌아갔다. 정부가 환도한 53년 11월 1일 윤석오는 마침내 차관직을 내려놓게 된다. 이후로는 단 한번도 관직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당 창당하려는 조봉암 극구 만류그가 초대 농림장관으로 밀었던 조봉암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무소속 대통령 후보로 연달아 출마해 1952년 11.1%, 1956년 30% 득표로 기세를 올리던 조봉암이 진보당을 만들려고 하자 윤석오는 그를 만나 극구 만류했다. 그의 우려대로 조봉암은 창당 3년 만에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윤여준은 "선친은 죽산의 진보적인 정치관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기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죽산이 처형당하던 날 선친이 '그러게 왜 고집을 피웠냐'고 비통해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전했다.
윤석오가 정치적으로 항상 올바른 노선을 견지한 것은 아니었다. 관직에 있을 때 그는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사람'이었다.
"이승만, 일제 유산 청산하지 않은 것은 중대한 과오"1949년 9월 12일 이범석과 안호상, 윤치영, 이기붕 등 이 대통령의 측근들이 일민주의보급회를 만들 때 그는 모임의 이사장을 맡았다. 일민주의는 '하나의 국민'으로 대동단결하여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취지의 국가통치 이념이었지만, 곧 이승만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만다.
윤여준은 "선친이 이 대통령에게 '나라를 세웠으니 이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한다'고 제안해서 안호상 문교장관이 이론으로 만든 이념이었다. 그러나 선친도 그런 식으로 변질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8년간 이승만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윤석오가 공직을 내려놓은 뒤 '주군'에 대해 내린 평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는다.
"이 박사가 단독 정부를 세운 것은 정치적으로는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일제 식민지의 유산을 청산하지 않은 것은 아주 중대한 과오다. 두고두고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미국의 교육 이념과 철학을 직수입했는데 우리의 역사적 배경이나 특성에 맞지 않아서 이 때문에 상당한 후유증을 앓게 될 것이다."이후 한학자의 길을 걸었던 윤석오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1980년 8월 5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