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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뤼벡의 토마스 만의 집 영화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무대이기도 했던 독일 뤼벡의 토마스만 박물관이자 그의 집. 2010 년
독일 뤼벡의 토마스 만의 집영화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Buddenbrooks)』무대이기도 했던 독일 뤼벡의 토마스만 박물관이자 그의 집. 2010 년 ⓒ 배수경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피에서인지 짜릿한 냄새가 가볍게 공중으로 퍼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게 그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시체의 머리칼이 살살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 산문집 중에서
                                                                   
영예와 부를 자랑하고도 남을 만큼의 대저택에는 이제 멋진 가구도, 콧대 높은 귀족 가문의 사람들도 찾아보기 어려운 채 바람에 날리는 커튼들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나 바람 만큼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렇듯 한 영화의 엔딩컷으로 자리잡아, 커다란 빈 공간 사이로 오롯이 바람만이 불고 있는 묘사는, 무심한 관객에게도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평화로우나 차갑고, 아름다우나 잔인할 만큼 생의 단면들이 여실히 드러나는 설정이 있을 수 있을까?

토마스 만의 집 앞 골목으로 지난 2010년 5월, 북부 독일의 안개가 짙고도 차분하게 내려 앉아 있는 날이었다. 저 끝 어디선가, 인간 시간의 그 찰나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화 속 마차 한 대가 달려올 것만 같아 나는 골목 어귀를 한참 동안 배회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창백한 외벽과, 집 안의 가구들에 뒤집어 쓰인 하얀색 천들은 오래 전 떠났던 부덴브로크 가 사람들의 형상을 꼼짝없이 대면케 하고는, 산다는 것의 본질 앞에 이방인의 마음조차 겸허해지도록 했다.

토마스 만의 집  토마스 만의 집 내부. 2010 년.
토마스 만의 집 토마스 만의 집 내부. 2010 년. ⓒ 배수경

'무한한 숫자의 생명들에 부재의 공간을 남겨 놓는 것'

실체 없이 그저 제 갈 길 대로 가다가, 그렇게 모든 것을 조용히, 그러나 성실하리 만큼 예외없이 데려가 버리는 바람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남겨진 텅 빈 공간들을 응시하다 돌아섰던 영화 속 카메라 렌즈처럼, 나는 건물 안 곳곳을 담담한 듯 하지만 조금은 시린 시선으로 따라가 보았다.

이 안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

토마스만의 192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각색한 작품으로, 도시 부유한 상인 가문 부덴브로크 가의 3대에 걸친 성공과 몰락을 담은 이 영화는,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무상하고 변전· 순환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하지만 흥망성쇠의 노정에서 벗어난 생명이 있을 수 없듯, 그 어느 도시와 마을이 생의 이 냉혹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공산주의 시절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던 동독 지역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가 있었음을 떠올리기에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파리, 한 때 제국을 이끌었으나 이제는 그 흔적들만이 남아 있는 오스트리아 그리고 무수한 영욕의 세월을 거쳤던 폴란드의 카라코우와 같은 지역들에서 그 부재의 공간들, 상실의 자국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폴란드, Krakow 폴란드, Krakow. 2010년.
폴란드, Krakow폴란드, Krakow. 2010년. ⓒ 배수경

폴란드, Krakow 폴란드, Krakow. 2010 년.
폴란드, Krakow폴란드, Krakow. 2010 년. ⓒ 배수경

"언젠가 나는 누군가의 방에 우연히 들어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책상 위에 먼지 쌓인 기사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이곳이 한 폭의 정물화 같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낡은 가구와 책상 위의 잡동사니들, 창틀 위에 놓여있는 빈 병,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장식품, 모두가 내게는 어떤 시적인 슬픔을 지닌 풍경으로 느껴졌다.

나는 카메라를 통해 내가 목격한 파괴를 고발하려 한다. 나는 고함 소리와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삶이란 그러한 좌절 속에서도 저마다의 아름다운 색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  영화 < 스틸라이프 > 지아장커 감독의 촬영 메모 중에서

진실로 모든 것이 한 시절의 이야기일 뿐인 것. 해가 뜨면 녹아 없어질 오래된 보석 같은 눈들의 운명처럼 모두가 애처롭고 가슴 저린 것.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어느 칠흑 같은 겨울 밤 호수에 비친 달빛처럼 더욱 선명히 빛나고 아름다운 것.

아무도 없는 새벽의 들판 위, 새들과 작은 동물들의 소리 외에는 어느 것도 들리지 않던 숲 길, 그렇게 고개를 들어 한없이 바라보면 수 만 광년이 걸린다는 별들의 이동도 가늠이 될 것 같던 시골 마을의 밤 하늘, 어느 도시의 오래된 골목과 빈 의자들 사이로 푸른 쓸쓸함이 파고들던 카페에서 삶의 빗장이 열리며 드러내 주던 진실들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게도 그 부재의 공간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견고한 진실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 태어나는 것들 사이  Krakow의 한 골목, 2010년.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 태어나는 것들 사이 Krakow의 한 골목, 2010년. ⓒ 배수경

불과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내가 걷고 있는 이 길들 어디에서도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나는 존재치 않을 것이라는 것. 이 모든 분주함과 삶의 고단함, 그 외의 모든 행위와 감정들 또한 존재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사라져 버릴 것들이라는 차디 찬 공허가 순식간에 퍼붓는 소나기들처럼 그렇게 꼼짝없이 온몸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잔인한 공허가 있었기에 생 앞에 절실할 수 있었고 겸손하지 못한 자의 온전한 복종이, 가슴과 영혼을 다하는 기도가 가능하지 않았던가. 찰나같이 지나치는 빛과 내음에도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 길 위의 아이들의 짧은 웃음조차 소중할 수 있었던 것, 하늘 언저리에 떠오르는 태양이 골목과 골목 사이로 드리우던 황금빛 그림자들 앞에서도 울 수 있었고, 사랑하는 이들의 살 내음을 향해 온전히 나를 재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덕분이었다.

 달리는 기차 밖의 풍경  달리는 기차 밖의 풍경
달리는 기차 밖의 풍경 달리는 기차 밖의 풍경 ⓒ 배수경

들판에는 다시 정갈하고 맑은 바람이 불었다. 덜컹 덜컹, 무심한 몸짓을 시작하는 기차를 따라 언덕 위에서 지던 노을이 길게 그 그림자를 따라나섰다. 공기에 부서지는 투명한 황금빛 햇살들이 희뿌연 유리를 통해 존재의 불꽃을 흘뿌리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고요하고 정체되어 있어 보이는 나무와 풀잎 안에서 분주히 일어나는 달그닥 달그닥 그 생의 소리들이 들리는 듯했다.

이것들 또한 그 어느 시간이 되면 생의 인연을 다할 일.  무엇보다 찰나 같은 시간을 살다 갈 인간인 나와 다시 마주하기란 천겁의 인연이 다해도 불가능할 지 모르는 소중한 생명들이었다. 그러니 아낌없이 사랑할 일이다. 존재를 다하여 느끼고 품어낼 일이다. 목적 없이 듣고 보는 일에 셈하지 않을 일이다.

 독일 뉘른베르크, 떨어진 꽃잎들  독일 뉘른베르크, 떨어진 꽃잎들. 2011 년.
독일 뉘른베르크, 떨어진 꽃잎들 독일 뉘른베르크, 떨어진 꽃잎들. 2011 년. ⓒ 배수경

죽음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유한성 앞에 온전히 엎드리는 순간, 그 텅빔의 운명을 직시하는 순간, 내게 온 것은 생에 대한 깊은 존경과 충만함이었다. 기적은 어마어마한 것들이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에 있었다. 그러한 진실을 어깨에 짊어지고 길 위에 서면 무섭고 두려운 일은 오히려 내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회전하고 바람은 다시 어딘가에서 불어왔다 무심히 가고 있다. 때로는 인간의 진심 따위는 내팽개쳐지는 것 같아 더없이 원망하고 서러워했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너의 그 무심함에 나는 더욱 마음을 다하려 했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으니.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했던가? 생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이 생을 오롯이 기억할 것이었다. 부재하기 전의 존재들을, 찰나였기에 더욱 소중했던 그 애달팠던 이름들을.

Warszawa, Poland .  어느 늦가을,  낙엽 놀이를 하고 있던 할머니와 손자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2010 년.
Warszawa, Poland . 어느 늦가을, 낙엽 놀이를 하고 있던 할머니와 손자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를'. 2010 년. ⓒ 배수경



#토마스 만#부재#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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