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태산이 도대체 뭐 길래(岱宗夫如何)"하고 두보 <망악>의 첫 구절을 떠올린다. 눈을 뜨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본다. 다행히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구름이 많다. 아침 일찍 홍문(紅門) 숙소를 나서는데 옆으로 세계지질공원 표지석이 보인다. 태산이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암반 지형을 이루고 있어 인문학적 의미뿐 아니라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높은가 보다.
홍문 바로 왼편에 관제묘(關帝廟)가 있어 잠깐 들러 관우에게 태산 산행을 고한다. 공자가 문신이고 관우는 무신인데, 태산과 인연이 깊은 공자만 우려먹기 머쓱해선지 태산 초입에 관제묘가 있는 모양이다. 여기에 한 무제가 봉선의식 때 심었다는 한백제일(漢柏第一) 측백나무가 있다.
흔히 빠른 속도로 정상에 올라서는 쾌감을 중시하는 등반을 무등(武登)이라 하고, 느린 걸음으로 산의 정취나 의미를 되새기며 오르는 것을 문등(文登)이라고 한다. 수천 년의 역사가 새겨진 석각 사이를 거닐며 올라야 하는 태산 산행은 아무래도 관우보다는 공자에, 문등보다는 무등에 가깝다. 부지런한 할아버지 몇몇은 벌써 어딘가에서 약수를 받아 산을 내려오고 있다. 천하의 태산도 그들에겐 그저 일상의 언저리에 놓인 뒷산일 뿐인가 보다.
일천문(一天門)을 지나며 천하기관(天下奇觀), 반로기공처(盤路起工處) 비문을 하나하나 읽자 아이들은 "무슨 도서관에 온 것 같네"라며 안 그래도 몸이 힘든데 머리까지 아프다는 반응이다. 진시황이 봉선을 했던 등산로는 북쪽, 한 무제는 동쪽 등산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 오르는 남쪽 홍문 등산로는 공자를 비롯한 문인들의 그윽한 풍취가 가득 묻어나는 곳(幽區)이니 돌로 된 책장을 넘기듯 서당훈장처럼 꼬장꼬장 갈 수밖에 없다.
100m도 안 가 공자가 태산을 오른 곳이라는 공자등임처(孔子登臨處) 표석이 나타난다. 1560년 명대 건립되었다가 문화대혁명 때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좌우로 제일산(第一山), 등고필자(登高必自)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중용>의 "등고필자비, 행원필자이(登高必自卑, 行遠必自邇)"에서 따온 말로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 출발해야 하고, 멀리 가려면 필히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공자는 삼십대 중반에 한 번, 그리고 말년에 안회 등 제자들과 함께 또 한 번 태산을 오른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태산을 오르며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라고 하는데 산행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태산을 하나의 디자인 작품이라고 한다면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소품들을 배치해 태산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공자등임처 석방 왼쪽으로 홍문궁이 있는데 원래 도가 사당으로 서쪽에 태산여신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셨으나 후대에는 동쪽에 태산미륵불까지 모셔 유불선이 하나로 통합된 양식을 보여준다. 하늘 계단이라는 천계(天階) 석방을 통과해 비운각(飛雲閣) 누각이 있는 홍문을 지나니 측백나무가 우거진 호젓한 산길이 나오며 등산의 맛을 약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태산의 남쪽 등산로는 천계 석방이 암시하듯 온통 계단길이다. 일천문에서 남천문까지 모두 6666개의 계단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하늘에 걸쳐 놓은 사다리'라고 한다. 계단을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을 위한 '태산 한국길'이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일단 천계를 정복한 후로 미루어 놓는다.
우측으로 계곡이 있는데 취심원(醉心園)이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공자가 산에 오르며 양파 모양으로 층층이 둥글게 갈라진 바위를 보고 술에 취한 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산은 곳곳에 수십억 년 전의 독특한 지질 현상들을 품고 있다.
측백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좀 더 올라가자 만선루(萬仙樓)가 나타난다. "관리는 지난에 많고 모든 신선은 타이안에 있다(濟南府的官多,泰安州的神全)"는 얘기가 민간에 전해질 정도로, 태산은 예부터 최고의 신 옥황대제를 비롯해 112명(태산의 봉우리 수이기도 함)의 신선들이 사는 신령스런 곳으로 여겨졌다.
만선루에는 신선과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팔선(八仙) 중의 한 명인 여동빈(呂洞賓)이 백목단(白牡丹)과 사랑에 빠져 아들 백씨랑(白氏郎)을 낳지만,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신선계로 돌아가 버린다. 태산 자락에서 어머니와 힘겹게 자란 백씨랑은 어머니와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도처의 신선들을 호리병에 잡아들인다. 그러던 중 태산에서 아버지와 마주친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복수의 순간 백씨랑은 너무 긴장해 호리병을 떨어뜨리고 마는데, 이때 그동안 잡아놓은 신선들이 태산 도처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신선이 사는 만선루 바로 앞에 매표소가 있다. 2월부터 11월까지 성수기 요금 125위안이 적용된다. 딸은 하필 우리가 성수기 마지막 날 왔다고 투덜대더니, 어느새 어학연수 학생증으로 반값 할인표를 끊어와 기뻐한다. 만선루 누각 뒤쪽에는 사은처(謝恩處)라는 글귀가 적혔는데 봉선의식에 참가한 관리들이 이곳에서 황제의 명에 따라 관아로 돌아가던 곳이라고도 하고, 황제가 태산 봉선을 마치고 내려오며 벽하원군에게 감사를 표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갈수록 멋진 경치가 더해진다는 점입가경(漸入佳境), 고상한 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앙지(仰止) 등의 글귀가 이어지다가 문득 오른편에 국공내전 당시 희생자를 추모하는 혁명열사기념비가 나오니 분위기가 안 맞는 느낌이다.
길 양쪽으로 한자 실력을 테스트하듯 석각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림 같은 글자가 유독 눈에 띈다. 중용의 용(庸)자처럼 보이기도 한데, 알고 보니 호랑이 호(虎)라고 한다. 오악지존 태산을 백수의 왕 호랑이에 비유한 것인데 이와 비슷한 초서체 글씨가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는 중천문(中天門) 근처에도 두 개 더 있다.
그 바로 위에는 읽기는 쉬운데 뜻을 가늠하기 힘든 석각이 하나 있다. '충이(虫二)'이다. 전날 대묘에서 이미 예습을 한 덕분에 아름다운 경치가 끝없이 닿았다는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풍월(風月)의 가장자리 테두리를 없애니 '충이'만 남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삼담첩폭(三潭疊瀑) 폭포가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조금 전 올라오며 본 상청을 밟는다는 의미의 '보상청(步上淸)'이라는 글귀가 떠오른다. 원래 하늘에 신선이 사는 옥청궁, 상청궁, 태청궁이 있는데, 기암괴석의 태산과 물 맑은 계곡이 바로 신선이 사는 궁전처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태산을 올라야 한다는 중압감에 계곡까지 내려갈 엄두는 못 내고 바로 위에 있는 투모궁(鬪母宮)을 둘러본다. 안내판에 한글로 '투모궁'이라 되어 있지만, 북두칠성이 뭇 별들의 어머니(태산이 뭇 산의 어머니)라는 의미일 테니 '두모궁'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무튼 1542년 중축되며 여승이 주지를 맡는 불교사원이다.
전설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 '충이(虫二)' 석각을 쓴 지난의 관리 유연계(劉延桂)가 이 절의 비구니가 불가에 걸맞지 않는 언행으로 지탄을 받자 이를 완곡하게 꾸짖기 위해 '벌레 두 마리'라는 의미로 '충이'를 썼고, 또 비구니에게는 인수(因受)라는 편액을 보냈는데 은애(恩愛)에 마음 심(心)을 뺀 것으로 은혜와 사랑에 진실한 마음이 없음을 질타한 것이라고 한다. 두모궁에서 '인수' 편액은 보지 못했는데, 문혁 때 파손되었는지 아니면 인자한 마음을 얻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좀 더 오르자 삼관묘(三官廟)다. 명대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진시황을 모시던 사당이었다가 청대에 천관, 지관, 수관을 모시는 사당으로 바꿨다고 한다. <도덕경>에 나오는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며, 도는 자연을 따른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삼관묘에서 조금 오르자 경석욕(經石峪)이라는 패방이 서 있다. 우측 계곡 암벽 위에 50cm 크기의 글자 44행, 총 2799자로 <금강경>을 새겨 놓은 곳이 있다는 표시다. 6세기경에 조각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마애석경인데 현재는 41행, 1069자만 해독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르막이 가팔라지며 땀이 나기 시작해 입었던 옷을 하나 둘 벗는다. '운로(雲路)'라는 글귀를 지나는데 구름과 안개가 그 의미를 알았는지 어디선가 슬슬 몰려오기 시작한다. 청명하는 날도 좋지만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 것도 몽롱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맛이 있다. 벽하영응궁(碧霞靈應宮)이라는 작은 사당 앞을 지난다. 도가에서 태산신으로 모시는 벽하원군을 위한 사당이 모두 세 개인데, 꼭대기에 벽하사, 중간에 홍문궁, 그리고 타이안 시내에 영응궁(靈應宮)이 있다.
정상에서 피울 향을 넣은 앞 사람의 배낭 너머로 하늘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길이라는 '천구(天衢)' 글귀가 보인다. 주위가 안개로 뒤덮여가자 오히려 앞에 놓인 길만 보고 올라가게 되니 힘이 덜 드는 느낌이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나무통이 뚝 하니 길을 가로막아 선다. 수나라 때 심은, 천년이 훨씬 넘는 홰나무였는데 1987년 폭우에 넘어진 것을 그대로 보존 중이다. 사괴수(四槐樹)라고 불리는 이 나무 외에도 태산에는 삼의백(三義柏), 와룡괴(臥龍槐) 등 3700여 그루의 고목들이 있다고 한다.
호천각(壺天閣)에 이르자 안개는 더 짙어진다. 건륭제가 1747년 태산에 오르며 주전자처럼 생긴 산 모양에 '호천각'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승선각에서 이름이 바뀌었다. 대련에 '등차산일반이시호천(登此山一半以是壶天)'이란 글귀가 보이는데, 곧 해발 800m인 이곳에 오른 것이 태산의 절반은 온 것이라는 뜻이다. 아이들에게 이제 절반쯤 왔다고 하니 비명이 메아리친다.
호천각 뒤로 꽤 가파른 언덕이라 말도 돌려보냈다는 회마령(廻馬嶺)이 있다. 산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봉회노전(峯廻路轉)' 글귀가 명실상부하게 그곳에 딱 붙어 있다. 위험한 구간이라 고대 태산에 살던 산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만들었다는 보천교(步天橋)를 지나 꽤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바로 앞에 칠순은 됨직한 할아버지 두 분이 지친 기색도 없이 산을 오르고 계신다.
허난(河南)성에서 왔다는 할아버지는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태산 등반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에게 태산 산행은 일종의 건강 정기검진 같은 것인가 보다. 관음, 보현, 문수보살을 모신 관음전을 지나자 '산고수장(山高水長)' 글귀가 나타난다. 산이 높아 물길도 유장한 태산에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봉우리처럼 높은 명성이 찾아와 강물처럼 길게 이어지길 바란다는 기원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짙은 안개 속에 긴 계단을 조심히 오르니 드디어 해발 847m 중천문(中天門)이다. 석방에 있는 '중천문' 세 글자는 경석욕 계곡에서 발췌한 것이다. 운무와 안개가 바람에 날리며 순간적으로 다양한 풍경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같은 곳인데 마술처럼 순간적으로 다른 느낌으로 산세가 변화한다.
천외촌(天外村)에서 이곳까지 30위안이면 버스로 편히 올 수도 있었건만, 두 시간 반 넘게 힘겹게 걸어 올라온 셈이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보람에 마음이 후련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남천문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머리 위를 지나가지만 물론 타지 않을 것이다. 이 뿌듯함을 또 한 번 더 크게 느끼기 위해서는 말이다.
중천문 석방 바로 옆에는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상의 부호석(阜虎石)이 있다. 정말 이곳에 호랑이가 많았던지 흑호묘(黑虎廟)라는 사당도 보이고 주변에 초서체 석각도 호랑이 모양이 많다. 중천문에서 전병을 하나씩 사 먹고 상가 거리로 내려오는데 노란 개나리가 철없이 피어 있다. 앞으로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 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복선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