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설날 아침이었다. 난 격일 근무로 일하는데 아침 7시 20분쯤이면 퇴근할 시간이다. 하지만 나 다음에 일할 설날 근무자는 경기도 송탄에서 살고 난 수원에서 산다. 설을 나눈다는 의미로 오전 근무를 양보했다. 아침 7시 30분 퇴근이지만 12시까지 근무하기로 했다. 고향에 갔다면 양보하지 못했을 일이다.
아내는 전날인 18일부터 네팔이주노동자여성들과 함께 설날을 맞아 네팔에서 온 가수들과 코미디언 공연을 보러갔다. 저녁은 함께 공연을 보러간 이주노동자여성들과 어울려 식사를 했다고 한다. 설날에는 아내의 고향 '오컬둥가' 사람들이 모여 향우회 창립대회를 수원역 앞 매산시장에서 열기로 했다. 나는 추석에 고향에 가기 위해 설을 양보하고 근무 중이다.
밝아온 설날, 나는 기원한다. 누운 부처님처럼 평온한 새해가 되기를, 명상을 하시는지 온갖 시름을 다 이겨낼 것 같은 평화로운 사색이 굳건해 보이는 앉은 부처님의 모습처럼 강건하시기를, 오래된 참빗으로 머리를 빗던 분들 할머니, 어머니, 누이들의 정갈한 머릿결처럼 인간의 질서가 있는 새해가 되시길, 아내와 동자승 앞에 손 모은 마음 모아 기원해본다.
오래 전 세계 최고봉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 아랫마을 사람들이 방앗간이 없을 때 움푹 패인 돌에 절구질을 해서 곡식을 넣어 방아를 찧어 먹고 살았다고 한다. '오컬'이란 움푹 패인을 의미하는 네팔어이고 '둥가'란 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지역의 이름은 오컬둥가가 되었다. 나중에 그곳에서 태어난 네팔의 저명한 시인 시띠쩌런 쉬레스타(Siddhicharan Shrestha)씨는 자신의 삶은 오컬둥가에서 시작되고 오컬둥가에서 마감한다는 유명한 시를 지었다.
훗날 나라얀 고팔이라는 가수는 그 시를 노래하여 수많은 네팔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아내의 친구이자 가수인 니샤 데샤르는 지난 2013년에 해당곡을 다시 불렀다. 그렇게 멀고 먼 사가르마타의 산 아랫마을 아내의 고향 사람들이 설날 수원에서 만났다. 자신들이 모여 스스로를 돕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 나중에 고향 사람들끼리 의지할 방법을 찾아 모임을 결성했다.
덕분에 설날인데도 나는 오후 4시 30분이 지날 때까지 모임에 함께 하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훗날 이 또한 네팔 사람들의 이주노동사에 한 장면이라 생각하고 사진을 찍고 동영상으로 만들어 전했다. 배경 음악은 네팔과 인연을 맺으며 알게 된 네팔 국가와 민요, '나의 삶은 움푹 패인 돌에서 시작되었다'고 노래한 메로 삐야로 오컬둥가(Mero Peyaro Okuldunggha)라는 곡으로 배경음악을 사용했다.
외국인 아내의 향우회 결성을 축하하느라 애쓴 설날 오후 나는 잠깐 집에 들러 김포에 여동생 집을 찾아 저녁 8시에 도착해서 떡국을 먹을 수 있었다. 모두가 버겁다 생각하는 요즘 모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방을 잃은 이 나라에 복을 올해는 꼭 찾아내어 우리 이웃과 형제와 사회와 민족이 나라의 안녕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나는 설날 아침 아내의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며 움푹 패인 돌, 우리네로 보면 절구통일지도 모르는 2년전 그곳에 가서 내가 보고 온 오컬둥가를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오컬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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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움푹 패인 돌을 보면 눈물이 나 내 눈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커다란 몸을 한 패인 돌이 온전히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거기 곡식을 받아 안고 자신의 몸과 함께 부딪혀 울때 비로소 우리에게 알곡이 있었다.
곡식을 한 움큼 쥐어 물고 밥알로 온 오컬둥가의 체온을 느낄 때 그때가 내게는 삼라만상과 하늘과 대지가 하나로 뭉쳐지는 찬란한 희열이 넘치던 찰나였다.
찰나와 찰나로 나를 이어준 오컬둥가 오늘 우리는 오컬둥가의 부스러기와 부스러기로 만나 이제 다시 오컬둥가의 허물린 가슴이 되자.
온통 질곡이던 시절에는 눈물 없이 밥을 지을 수 없었듯이 우리 이제 하나 둘 눈물로 만나 부스러기와 부스러기로 어우러지자.
이제 내 고향 우리들의 고향 오컬둥가에 가서 커다란 바윗돌이 되자. 오! 오컬둥가 오! 우리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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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