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의 일본경제는, 80년대의 거품이 빠졌기 때문에 연일 침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주가와 부동산가격이 폭락했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투자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때 피해를 보거나 도산한 기업이 한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업계는 바로 금융권이었다. 금융권은 80년대 거품경제 시대에 조직 폭력단과도 거래를 했기 때문에 더 피해가 커졌을 것이다.
거품 시대에 폭력단은, 은행에서 신용조합에 이르는 다양한 금융 기관으로부터 거액을 차입해서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했다. 그리고 거품이 꺼졌다. 폭력단이 빌려 쓴 자금은 대부분 부실 채권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금융권에게 피해로 돌아갔다.
은행들은 폭력단에 대해 강력하게 채무변제를 요구하지도 못했다. 그랬다가는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에 부실채권과 관련해 폭력단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지점장도 있었을 정도다. 이 사건은 결국 증거불충분이라서 미제로 종결되었다.
한 대형은행이 가지고 있는 비리다카스기 료의 1997년 작품 <금융부식열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부실채권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들려준다. 부실채권의 근본적인 문제는, 빌려 줘선 안 되는 사람이 빌려 줬고, 빌려선 안 되는 사람이 빌렸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이렇게 문제를 진단하더라도 거품 시대 당시에는 그런 자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80년대에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올랐고, 많은 사람들은 그 거품이 이후로도 유지될 거라고 장밋빛 상상을 한다. 빚을 내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대박을 꿈꾼다. 하루아침에 쪽박으로 돌변할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금융부식열도>는 거품경제가 막을 내린 1990년대 초반의 일본 금융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대형은행에 근무하는 다케나카 하루오. 그는 한 지점에서 부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정기적인 인사이동 때문에 본점 총무부 조사역으로 발령받았다는 통보를 받는다.
총무부 조사역이라면 주주 총회때마다 나타나는 '총회꾼'들에 대한 대책을 담당하는 일을 할 가능성이 많다. 총회꾼이란 금품을 목적으로 주주총회 현장에서 의사진행을 방해하거나, 소위 '깽판'을 치는 소액 주주들을 말한다. 다케나카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인사이동이다.
하지만 본점의 한 간부가 은밀히 다케나카를 불러내서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케나카는 총회꾼 상대가 아닌, 완전히 다른 임무를 맡게 될테니까 그를 통해서 1년만 회장님을 지원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본점 상무까지의 진급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기회일까. 어쩔 수 없이 임무를 떠맡은 다케나카는 본점의 간부들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비리와 마주하게 된다.
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계의 풍경작가 다카스기 료는 <금융부식열도>를 포함해서 여러 편의 기업소설, 경제소설을 발표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일본의 경제 전반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금융부식열도>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다보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경제용어와 개념들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그런 부분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적당히 건너뛰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부분은 위기에 빠진 개인과 조직이 어떻게 그것을 타개하고 극복하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경제를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돈은 혈액이다. 혈액이 돌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금융권은 그 혈액을 돌게 만드는 심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금융권에 뭔가 비리가 끊이지 않는다면 전체 경제에도 그만큼 나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작품에서는 거품시대 이후 일본 경제계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 대기업이 도산하면 그 밑에 있던 도급업체들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목을 매는 사람도 있고 어디론가 야반도주하는 사람도 있다. 돈줄이 끊어지면 목숨 줄도 끊어진다. 거품이 꺼지더라도 돈은 돌고 돌아야 하는 법이다.
덧붙이는 글 | <금융부식열도> 1, 2. 다카스키 료 지음 / 이윤정 옮김. 펄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