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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징비록>의 표지
<소설 징비록>의 표지 ⓒ 북오션
1592년 임진왜란은 섬나라 일본이 대륙을 향한 야욕을 실현하고자 일으킨 전쟁이었고, 우리 조선에겐 참사였다.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린다'는 지극히 허황한 논리를 내세워 벌어진 전쟁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무장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남아도는 무사와 무기를 쏟아부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전쟁의 징후가 보였지만 조선은 왜놈들이 내전으로 갈고 닦은 저력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왕, 선조는 사대부들의 당쟁을 즐기고 있었다. 굳이 즐기고 있었다는 표현을 한 이유는, 선조가 당쟁을 이용했기 때문인데 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영리한 선조는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분리된 당시 사대부들을 지켜보면서 이이제이(以夷制夷) 효과를 노렸다. 선조가 일으킨 여러 번의 환국(換局)으로 국정은 장악했을지 몰라도, 조선 중기 중종, 명종 대를 거치면서 추락한 왕의 위상과 상대적으로 강해진 신권(臣權)으로 구성된 조선의 정치지형은 백성들의 삶을 곤궁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 안보에 구멍을 초래했다. 서애 류성룡의 삶을 그린 팩션, 소설 <징비록>은 현재에도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서인의 맹주는 송강 정철이었고, 동인에는 서애 류성룡이 있었다. 동인이었던 정여립의 역모 사건으로 옥사가 시작되자 서인 정철은 선조와 물밑 접촉을 통해 천여 명이 넘는 동인을 역모사건으로 엮어 사사(賜死)하거나 유배시키는 악역을 자처했다. 정치는 돌고 도는 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이른바, 건저 문제로 선조의 비위를 거슬려 위기에 처하자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이산해를 비롯한 동인은 정철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진정한 해결사 류성용

류성용은 달랐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정철을 사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정철의 수 많은 가사와 시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류성용 덕택이다. 이 문제로 동인은 이산해를 중심으로 북인과 류성용을 중심으로 한 남인으로 나뉜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서인의 영수로 알려져 있지만 당색에 연연하지 않았듯이 류성용 또한 당파와 상관없이 대의에 충실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는 각각의 내용이 정 반대였다. 전쟁에 대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선조는 전쟁은 일어날 리 없으며 쥐 상(像)을 한 풍신수길이 대단한 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한다. 1592년 임진왜란은 무방비 상태로 시작됐다.

당시 호걸은 류성용 이었다.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천거한 인물이 류성용이었으니 말이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와 허황된 보고를 했던 김성일을 사형시키려는 조정을 설득해 그가 의병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인물도 류성룡이었다. 행주산성을 지켜냈던 권율을 발탁한 것도 류성용이었고, 천민들이 왜군의 수급을 베어오면 면천을 시켜준다는 법을 만든 사람도 류성용이었다.

"지난 사월 열사흘, 왜적이 남도를 유린하고 풍우처럼 한양으로 짓쳐 올라오니 망극할 사 임금께서 서도로 몽진하시게 되었다. 전국의 유림, 승려, 속인을 비롯하여 모든 생민들은 들으라. (중략) 너희가 한양과 평양의 뒤에서 왜적을 치면 왜의 주력이 당황하게 될 것이고, 명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내쳐 한양을 수복하게 될 것이다. 이 격문은 각 도에 보내고 각 도는 격문을 필사하여 고을에 보내고, 고을은 의사들에게 보내 창의의 깃발을 들게 하라."(p.304)

그러나 류성용은 야당인 남인이었고, 선조는 자신밖에는 모르는 인사였다. 분조를 이끌고 참전한 아들, 광해군과 한산도대첩으로 이름을 떨친 이순신에 질투한 인물이 선조였으니 말이다. 특히 선조는 원균을 높이 치켜 세웠는데, 임진왜란 당시 경상 우수사였던 원균이 밀려오는 일본의 수군에 압도된 나머지 싸워보지도 않고 배와 포와 병장기를 모두 수장(水葬)시키고 내륙으로 도망한 기록을 상기한다면 어이없는 일이다.

당리당략의 미혹에 빠진 정치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피난을 갔던 조선의 왕, 선조는 요동, 즉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를 결사 반대한 인물이 류성용이다. 누가 봐도 병법에 능하고 사리분별에도 탁월했던 인물이었으므로 전쟁의 혼란 속에서는 선조가 류성용을 영의정으로 또, 도체찰사로 임명해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권을 손에 쥔 류성용은 창의적인 대책을 정책으로 활용하여 민심을 돌리는데 성공한다.

전쟁이 끝나고 급한 불이 꺼지자 선조는 돌변한다. 류성용이 시행했던 정책, 면천법 등을 없었던것으로 했고 서인들과 부화뇌동하여 류성용을 탄핵하는데 앞장섰으니 말이다. 류성용은 선조와 다른 정치모리배들과는 달랐다. 조선의 대신들 중 한준겸이 류성용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자.

"공은 피나는 정성을 다하여 중국인을 설득하여 임금의 위(位)를 안정되게 했다. 공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소리 하나 내지 않으면서 국가의 기반을 태산같이 튼튼하게 다졌다. 일이 모두 끝난 뒤에는 입을 막고 그 당시 일을 말하지 않으니 신기로운 공을 세우는데도 고요히 처리하여 애초에 일이 없었던 듯했다."(p.370)

류성용이 남긴 <징비록>의 서문은 "언젠가 일본은 다시 쳐들어온다. <징비록>은 그때를 위해 과거를 반성하고 철저하게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로부터 약 300년 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류성용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금의 기득권의 상당수는 서인에서 분화되어 300년 역사를 가진 노론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일본으로부터 작위나 은사금 등을 받은 대한제국의 수뇌부들 중 대부분이 노론이었다. 노론과 친일파들의 후예는 여전히 미래를 대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시대의 류성용은 누구인가?

덧붙이는 글 | <소설 징비록> 이수광 지음, 북오션, 2015년 2월 10일 발행



소설 징비록 - 서애 류성룡의 임진왜란 비망기

이수광 지음, 북오션(2015)


#류성용#정철#이순신#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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