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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고 탈 많았던 분쟁 사립학교법인 선인학원의 인천대학교는 1994년 3월 1일 '시립 인천대학교'로 출범했다. 사적 영역에 있다가 공적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당시 인천지역 곳곳엔 시립 인천대 출범을 알리는 축하 현수막이 게시됐다. 인천시민들은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올해 3월 1일은 분쟁 사학이 학내 구성원의 노력과 인천시민의 지지, 정치권의 협조로 시립화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사학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선인학원과 함께 대표적 분쟁 사학이던 상지대는 각종 비리를 저질러 쫓겨났던 이사장이 다시 등장하면서 지금도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여러 사학에서 비리 등으로 구성원 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 분쟁 사학이었던 인천대가 어떻게 시립화를 거쳐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지를 돌아봤다. 고등 교육의 85%를 차지하는 사학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 기자 말

선인학원, 어떻게 탄생했나?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한 백인엽(白仁燁)은 1958년 사립학교 성광학원을 인수한 뒤 1965년 학원 명칭을 '선인'으로 변경하고 학원 이사장이 됐다. 그는 2013년 12월 14일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당시 90세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 원로로 평가받은 백선엽(95) 예비역 대장의 동생으로 더 유명했다. 백선엽은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만주국 군인 장교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3년부터 45년까지는 항일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백선엽이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대한민국이 해방됐다.

백선엽은 1961년 5월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정권과 특수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 덕분에 선인학원 운영은 탄탄대로였다.

백선엽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돼 사형 처분의 위기에 놓인 박정희를 살려냈다. 이후에도 군부 실세로 박정희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의 당위성을 얻기 위해 부정부패 척결을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백인엽은 이른바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아래 상자기사 참조)으로 구속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거금인 7247만 1723환 추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은인의 동생을 구속 10개월 만에 석방했다. 이후 백인엽은 사학 사업에 전념한다.

1964년 인화여자중학교와 인화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성광중학교 교명을 선인중학교로 바꿨다. 그 이후 항도상업기술학교를 인수하고, 효열국민(초등)학교 등을 신설했다. 또한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1977)와 인천대학(1979)을 설립하고, 인천체육전문대학과 인천공업전문대학을 인천전문대학으로 통합(1981)했다.

선인학원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학교 14개(학생 3만 6400여명, 교직원 1만 4000여명)를 거느린 인천 최대 사학이었다. 인천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이들 중 선인학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고등 교육 85% 사학이 책임, 기형적 구조 고착화의 배경은?

식민 지배와 분단,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은 헐벗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라 국민을 모두 교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가는 폭발적인 교육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고, 이 틈을 사학이 채웠다. 개발독재시절에도 국가의 역량을 수출산업 증진에 집중하느라 공교육 투자에는 인색했다.

이는 고등 교육의 85%를 사학이 책임지는 기형적 구조를 고착화했다. 이러한 기형적 구조는 현재진행형이다.

초등 교육 즉,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각각 98%와 79%를 국공립에서 책임진다. 그러나 중등 교육(고교)부터 사립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고교의 경우 41%가 사립이다. 고등교육인 대학(교)은 더욱 심각해 사립이 84.3%(295개교)에 달한다.

대한민국 교육의 성패는 사학의 성패란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사학 비리는 수십 년에 걸쳐 이어져오고 있다. 지금도 사학의 횡령이나 회계 부정, 임용 비리, 입시 부정이 이어지고 있다. 2013년에도 1000억 원대의 교비 횡령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립대학은 여전히 교원 신규임용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하는 등, 대학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부실 운영을 비판하는 교수나 학생을 강단과 교실에서 내쫓고 있다.

세상에 드러난 선인학원의 비리

군사독재정권 시절 몸집을 키운 선인학원은 온갖 부정·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문을 연 지 2년도 채 안 된 학교에서 설립자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시작됐다.

선인학원 내 운봉공고·운산기계공고·항도실고 학생 1500여 명은 1980년 3월 22일 수업을 거부한 채 교내 운동장에 모여 백인엽 축출, 교내 민주화, 실습시간 연장, 보충수업료 인하, 무능 교사 퇴진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날 학생들은 학내건물 일부 유리창을 깨고 제물포역 도로로 진출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세 학교는 무기한 휴업 조치를 받았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불리던 민주화 분위기를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 역시 권력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개혁조치를 취했다. 사학 비리에 손을 댔고, 당시 문교부 감사에서 선인학원의 비리는 하나하나 밝혀졌다. 1979년 1월부터 무려 9900명을 부정한 방법으로 입학 또는 편입학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기부금 61억 원 중 상당액을 백인엽이 횡령한 것도 드러났다. 비리가 추가로 적발되자, 백인엽은 업무상 횡령으로 밝혀진 재산을 양도·헌납하겠다는 서약서를 1981년 3월 21일 검찰에 제출했다.

백인엽은 검찰에 제출한 '개인재산 양도·헌납서'에 '학교 공금 중 본인이 횡령한 7억 5000만 원과 소비처 불명액 3억 5000만 원을 변제하고 (중간 생략) 서울 충무로 건물, 개발 신탁 수익증권 등 총7억원 상당을 학교법인에 양도·헌납하겠다'고 적었다.

다음날엔 '선인학원 국가 헌납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선인학원과 학원 산하 학교 16개를 헌납하고 선인학원 이사장직을 사임하겠다고 서명했다. 그 후엔 '101억 6773만 8000원과 일화 20만 엔을 학교법인 선인학원의 발전을 위해 기증한다'고 서약했다.

결국 선인학원 이사회는 1981년 4월 6일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는 의안을 정식으로 채택해 이사 전원 찬성으로 의결했다. 이날 이사회는 1958년 성광학원을 인수하고 1965년 3월 선인학원으로 개편한 이후 16년 만에 처음 공식적으로 열린 이사회였다.

수만 장병 영양실조 만든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의 부정부패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언론 보도로 처음 알려진 사건은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이다. 백씨는 이 사건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일명 '혁명정부'에 의해 구속돼 무기징역과 함께 거금 7247만 1723환 추징을 선고받았다.

'6군단장 군사 독직 사건'으로 당시 다수의 현직 군인이 실형을 선고 받고 구속됐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군 검찰부는 1962년 1월 29일 전 6군단 군수참모 김아무개 대령 등 4명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당시 군 검찰부가 밝힌 혐의 내용을 보면, 피고인들은 전 6군단장 백인엽의 심복 부하로서 장병 부식 납품업자들로부터 도합 6000여만 환을 뜯어 뇌물을 바쳤고, 장병 부식마저 가로채 수만 장병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했다.

또한 백씨가 6군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군수참모 1지구 급양대장 전속부관 등으로 복무하면서 군납업자들로부터 납품액의 10% 내지 15%를 거둬 1억 212만여 환을 백인엽에게 뇌물로 상납했다.

이밖에도 1958년 1월부터 5월까지 사이에 6군단 예하부대인 259수송자동차부대 대장 최아무개 중령과 짜고 매달 자동차 15대 내지 20대씩을 후생 사업에 내보내 총 1000여만 환을 부정 취득하고, 군단 예하부대에 배급하는 휘발유 중 매달 200드럼씩 총1000드럼을 부정처분해 500만 환 상당의 이득을 취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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