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현 창원시장) 검사는 지난 1987년 2월 26일 신창언 서울지검 형사2부장을 통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수사검사를 접견하고 싶다고 요청한 사실을 전달받았다. 박종철 고문치사-조작·은폐 사건(아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차 수사가 끝난 지 한달 여 뒤였다.
이에 따라 안 검사는 다음날(2월 27일) 오후 7시께 영등포교도소를 방문해 보안과장실에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공범이 3명(황정웅·반금곤·이정호) 더 있다"라는 중대한 증언이 나왔다.
안 검사는 이러한 증언을 다음날(2월 28일) 정구영 서울지검장과 서익원 차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3월 4일 수사계획서까지 작성했다. 그런데도 수사 지시는 떨어지지 않았다. 정구영 검사장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치안본부 쪽에서 자기들도 조한경, 강진규를 만나 진상을 알아봐야 하니 10일만 시간을 달라는 거요. 그런 뒤에 내무, 법무장관과 안기부장이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어) 재수사 여부와 시기를 결정해서 통보해준다고 하오."(안상수, <안검사의 일기> 중에서)3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 결과가 검찰에 통보됐다. 재수사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났다. 안기부 등에서 "검찰만 공을 세우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검찰도 경찰도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조직인데, 나라를 위해 검찰이 양보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냐"라며 사건 은폐를 밀어붙였다. 그러는 사이에 박상옥 검사는 여주지청으로 발령났고(3월 12일),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됐다.
박처원 치안본부 5처장은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회유 공작에 나섰다. 신창언 부장도 3월 27일 이들을 접견해 이들이 '공범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그대로 재판받기로 한 결심을 확인했다. 경찰의 회유공작이 먹혀들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은 이렇게 은폐되어 갔다.
2월 27일부터 5월 18일까지 진행된 검찰의 직무유기5월 11일 오후 2시 30분 장충공원 앞 엠버서더호텔 1817호실. 신창언 부장과 안상수 검사가 정형근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을 만났다. 정 단장은 이 자리에서 '안기부의 방침'을 이렇게 통보했다.
"우선 안기부로서는 이 시국의 진상이 새로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재야와 학생이 들고 일어날테고 야당이 단합하게 된다. 현재 정부는 5공화국 출범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절대 깨져서는 안된다. 이 상태에서 재판이 끝나야 한다. 이것이 안기부의 방침이다."(안상수, <안검사의 일기> 중에서)박종철 열사의 물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실수사 논란이 일었던 1차 수사 결과의 한도에서 재판이 진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정형근 단장은 이 자리에서 "이 사건은 묻혀야 하고 또 묻힐 수 있다, 1심만 무사히 지나면 영원히 묻힐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폐된 진실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정형근 단장이 "영원히 묻힐 수 있다"라고 발언한 지 1주일 뒤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사건 범인은 조작됐다, 구속된 조한경, 강진규는 진범이 아니고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진범이다"라고 폭로했다. 김 신부의 폭로는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와 같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전 의원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이었다.
검찰은 이틀 뒤인 5월 20일에서야 재수사에 나섰다. 여주지청으로 발령났던 박상옥 검사가 수사팀에 다시 합류했다. 이렇게 박 검사는 1차 수사에 이어 2차 수사에도 참여하게 됐다. 2차 수사는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9일간 진행됐다.
박 검사는 2차 수사에서 강진규 경사와 반금곤 경장, 황정웅 경위, 이정호 경장, 서울대생 하종문씨 등을 조사했다. 진술을 번복한 이유, 반금곤·황정웅·이정호의 물고문 가담 과정 등이 주요 신문 내용이었다. 반금곤 경장과 황정웅 경위, 이정호 경장은 5월 21일 구속됐다.
추가 고문경찰관 존재 1차 수사 때부터 알고 있었나그렇다면 박상옥 검사는 추가 고문경찰관의 존재를 언제 처음 알았을까? 박 검사쪽은 대법관에 임명제청된 직후 부실수사 책임 논란이 일자 "3월 초에 안상수 검사를 통해 처음 들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1차 수사팀에 참여했던 박 검사가 위에다 재수사나 수사기간 연장을 요구한 흔적은 전혀 없다.
박 검사는 3월 12일 여주지청으로 발령난 사실을 들어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수사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여주지청으로 발령난 뒤에도 사건추이를 주시하면서 수사정보를 공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5월 21일 "고문경찰관 3명을 추가로 구속했다"라고 발표하면서 "검찰은 5월 초에 새로운 사실을 처음 인지하고 수사중이었다"라고 말했다. 안상수 검사가 2월 27일 처음 추가 고문경찰관 존재를 인지해 정 지검장에게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한 것이다.
검찰이 추가 고문경찰관 존재를 처음 인지한 2월 27일부터 김승훈 신부가 이러한 사실을 폭로한 5월 18일까지 거의 석달 동안 진행된 '검찰의 직무유기'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최소한 "3월 초"에 추가 고문경찰관 존재를 알았다는 박 검사가 정 지검장의 거짓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게다가 박 검사가 1차 수사 때부터 추가 고문경찰관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진규 경사는 5월 20일 피의자 신문에서 "전에 검사님(박상옥)이 다른 직원들이 가담되었는지 여부를 집요하게 물어보았다"라고 진술한 것이다.
또한 항소심 공판조서에도 "(박상옥 검사가) '반금곤이 주범인데 왜 강진규가 주범자로 되어 있느냐?'고 추궁했다"라는 강 경사의 진술이 있다. 다만 1차 수사기록에서는 이러한 강 경사의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것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언론보도에 떠밀려 조작·은폐 윗선 수사 나섰지만...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사건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대공수사2단장 전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 홍승상 경감 등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의 실명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5월 22일에서야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박처원 치안감 등 치안본부 간부들이 개입해 두 명으로 축소·조작했고, 1월 말경 구속된 조한경 경위 등이 심경변화를 일으키자 계속 조 경위를 면회하면서 입을 막으려 했다"고 보도했다.
사제단은 당시 성명서에서 "검찰이 이같은 사건 조작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증명하듯 박 검사는 이러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강진규 경사(5월 20일)와 반금곤 경장(5월 21일)을 조사했지만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았다. 강 경사나 반 경장 신문은 추가 고문경찰관들의 물고문 과정을 캐묻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 수사는 1차나 2차 모두 부실했던 것이다.
그나마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의 실명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는 조금 진전된 태도를 보였다. 박 검사는 5월 23일 황정웅 경위와 이정호 경장을 신문했는데, 이정호 경장에게는 "전에 피의자에게 허위진술을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이 경장이 "조한경이 짠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라고 답변하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또한 박 검사는 황정웅 경위에게는 최초 심장 쇼크사로 보고하게 된 경위를 물으면서 "누가 그런 보고내용('턱 하니 억 하고 죽었다')을 만들었냐?" "위와 같은 보고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상급자들이 다 알고 있었나?"라고 추궁했다. 이어 박 검사가 "사고 후 상급자들과 이야기한 일이 있나?"라고 묻자 황 경위는 "유 과장과 박 계장을 사고 후에도 사무실에서 평상시와 같이 만났으나 그들은 사고경위를 물어본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이미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전석린-유정방-박원택-홍승상'이 개입했다고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사고경위를 물어본 일이 없다"라는 황 경위의 답변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박 검사는 이를 반박하지 않았다. 이어 "유 과정과 박 계장 외에 전석린 단장이나 그 외 상급자들을 만난 일이 있나?"라고 물어본 정도다. 이에 황 경위가 "없다"라고 답변하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1차 수사팀에 참여했던 박 검사가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지나쳤을 리 없다. 그런데도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한 윗선의 실명이 언론에 보도되기까지는 '윗선'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언론보도 이후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윗선 수사에 나섰지만 그것조차도 부실했다.
2차 수사에서도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없었다김수환 추기경은 5월 26일 명동성당 특별강연에서 수사팀 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야당에서도 "새로운 수사진이 원점부터 재수사해야 한다"라고 압박했다. 결국 이종남 신임 검찰총장은 취임식 직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대검 중앙수사부(아래 '중수부')로 이첩하라고 지시했다. 검찰 수사가 국민으로부터 불신받자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신창언-안상수-박상옥' 등 기존 수사팀은 대검 중수부 수사팀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사실상 '강등'됐다.
새로운 수사주체인 대검 중수부 수사팀은 5월 29일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사건을 이첩받은 지 이틀 만이었다. 검찰은 박처원 처장과 유정방 과장, 박원택 계장을 범인도피죄로 구속했다. 조작·은폐에 개입한 윗선을 '박처원-유정방-박원택' 선에서 잘라버린 것이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경우 "범인 축소·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전혀 없다, 그만둘 때까지 축소·조작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라고 결론내렸다. 또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했다고 지목한 전석린 단장과 홍승상 계장도 무혐의 처리했다. "꼬리 자르기 수사"나 "봐주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수사팀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사건 조작·은폐 과정에 개입했는지, 어느 정도까지 개입했는지 등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관계기관대책회의에는 안기부장과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청와대 정무1수석 등이 참석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통제탑(control tower)으로서 검찰과 경찰 수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009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관계기관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역할을 이렇게 결론내렸다.
"검찰, 경찰 수사에 영향을 행사한 사실과 검찰의 수사권을 제한하거나 방해한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경찰의 은폐․왜곡된 수사결과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 사건 초기 기소권이 있는 검찰의 직접수사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찰 치안본부로 수사주체가 바뀌는 과정이나 추가 공범 3인을 알고도 이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안기부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개입한 점이 확인된다."검찰은 이미 3월 21일 관계기관대책회의로부터 '재수사 불가'를 통보받은 적이 있어서 관계기관대책회 개입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문제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는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서 "검찰이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국민에게 은폐 사실이 폭로된 이후에야 추가 공범을 포함 치안본부 관계자 등 은폐에 가담한 책임자를 최소한만 기소하여 결과적으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대검 중수부 수사팀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를 회유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2억 원의 출처도 제대로 캐지 않았다. '안기부 비자금설'이 제기됐지만 수사팀은 "박처원 치안감 차원에서 경찰 수사공작비에서 마련한 돈이다"라며 더 이상 수사하지 않았다.
3차 수사까지 이어졌다는 것 자체가 '부실수사' 증명지난 1988년 1월 12일 <동아일보>는 박종철 열사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검찰에서 물러난 안상수 전 검사 등을 인터뷰해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외압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개입 의혹을 보도했다. 대검 중수부는 다음날(1월 13일) 바로 재수사('3차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5일 강민창 본부장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앞선 2차 수사에서 강민창 본부장을 무혐의 처리한 바 있다. 그런 강 본부장을 구속함으로써 검찰은 스스로 부실수사를 인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차 수사(4일), 2차 수사(9일), 3차 수사(3일)까지 거치고서야 일단락됐다. 짧은 수사기간은 물론이고, 3차 수사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검찰의 수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차 수사는 경찰의 수사 결과를 추인하는 수사였고, 2차 수사는 김승훈 신부의 폭로 내용에도 미치지 못한 수사였고, 3차 수사도 언론보도에 떠밀린 수사였다. 인권의 최후 보루를 자처해온 검찰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수사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부실한 수사의 책임에서 박 검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학규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5공화국 대표적인 인권유린사건 중 하나인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조작 사건의 수사검사가 대법관이 된다는 것은 당시 인권유린의 부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박종철 열사를 또 다시 죽이는 행위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1987년 5월 18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으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라고 적시했다. 그 중대한 사건을 두 차례나 수사했던 박상옥 검사가 부실수사 책임 논란에 어떻게 답변할지 오는 7일 대법관 인사청문회가 주목된다.
[관련기사] [분석] 대법관 후보자 '박상옥 검사'가 그때 조사해야 했던 몇 가지① 물고문은 5명이 한 조... '상식' 묵살한 검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