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부족하고 학업성적도 부진한 남자 아이가 있었어요. 글씨 교정을 40시간 했는데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단지 글씨를 교정했는데 성적이 오르고, 성격이 차분해졌죠. 학교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던 아이였는데 글씨를 잘 쓰니까 인기가 많아졌어요. 담임교사가 글씨를 제대로 쓰고 싶으면 그 친구한테 찾아가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고 하더라고요."글씨를 바르게 쓰는 법만 배워도 자존감과 성취감, 기억력과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글씨 교정의 전도사, 현목 송병훈(57) 선생을 지난 3월 31일 연수구 연수동 현목서화각연구소에서 만났다.
한국화와 미술사, 이론과 실기를 겸하다
송 소장은 언제부터 글씨 교정에 관심을 가졌을까?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의 인생역정을 따라가 보니, 그가 지금의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기본'을 중시해온 그의 태도이자 자세였다.
인천 남구 도화동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따로 미술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려 상을 타고 교사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제가 생각해도 재능과 끼가 있던 거 같아요. 8남매 중 여섯째인데, 형과 누나들도 예술적 감각이 보통이 아니었죠. 사실 전 미술 분야에 애정이 많지는 않았어요. 사람을 좋아해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제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강했죠. '나로 인해 주변 사람이나 상황이 좋아졌으면' 하는 욕심이 많았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고등학생 때부터 삶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그는 대입을 코앞에 둔 3학년이 돼서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그림을 계속 그리라'는 중3 때 담임교사의 말이 떠올라, 강릉대 미술학과에 입학해 한국화를 배웠다.
서예·수묵화·동양화 등의 실기를 배우면서 미술 이론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강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만과 북경에서 미술사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유럽에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귀국했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소중한 가정이 생겨서다.
또 다른 인생의 오솔길, 미술관과 만나다2000년 모교에서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열중할 즈음, 의재문화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의재 허백련 화백을 기념하기 위한 미술관을 짓는 데 힘을 보태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교수직을 박차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말년에 무등산 자락에 있는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춘설차(春雪茶)를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많은 명작을 완성한 의재 선생의 정신을 함께 하고 싶어, 미술관을 짓는 일에 흔쾌히 동의했다. 의재 선생의 작품과 무등산의 조화를 건축물에 담아낸 것이 좋게 평가돼, 미술관은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과 관계가 어려워져 그만뒀다.
그 후 2003년 무렵 대기업 제품 디자인 홍보 업무를 하고 있는 후배를 찾아가 우연히 제품 이름을 손 글씨로 써봤는데 그게 반응이 좋았고, 그렇게 디자인된 제품이 출시됐다. 그것을 계기로 삼성·LG 생활건강·CJ·두산 종갓집·도원 F&C·화인픽쳐스 등, 많은 회사와 캘리그래피 작품 활동을 했다.
송 소장은 자신의 호를 현목이라 스스로 지었다. 지난해 9월엔 현목서화각연구소를 세웠다.
"검을 현(玄)은 블랙(black)의 '검다' 뜻보다는 딥(deep)의 '깊은, 짙은' 의미에 가깝습니다. 어릴 때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혼자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대학 때는 일부러 신문배달을 하면서 고생을 자처하기도 했죠. 그때 그곳에서 만난 분이 '세상에 나가 큰 힘이 되어라. 그러기 위해서는 너른 품을 갖고 뿌리를 내려라'라는 멋진 말을 해주셨어요. 그 의미를 담아 큰 나무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현목(玄木)으로 지었습니다."현목서화각연구소를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서(書)는 글씨나 서예, 화(畵)는 그림, 각(刻)은 서각(書刻)을 뜻하는 거죠. 서화각을 함께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이 많지는 않아요. 2012년에 대기업과 캘리그래피 디자인 관련 소송이 있었는데, 그 후 서예든 캘리그래피든 글씨 교정이든 다 연계돼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송 소장은 2011년 3월 초 디자인회사 A로부터 캘리그래피 제작 의뢰를 받았다. 주문 내용은 LG 생활건강의 비누·치약·린스 제품명의 글자 디자인이었다. 납품 계약을 맺고 디자인을 납품했다. 그러나 가격 협상이 중단돼 없던 일이 된 줄로 그는 알았다.
2012년 4월, 송 소장은 웹 서핑을 하다가 자신이 제작한 캘리그래피를 제품 디자인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디자인회사 A와 LG 생활건강을 상대로 민·형사 고소했고, 피고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송을 마무리했다.
표준화된 글씨를 만들다
"주부·학생·노동자·노인·교사 등, 다양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글씨라고 하는 것이 한 사람한테 끼치는 영향이 엄청 크다는 걸 느꼈어요. 2013년에 부천 중동에 글씨 교정 학원을 낸 후 부천 상동에 분점을 내고, 작년에는 연구소를 세웠습니다. 대전과 청주에도 학원이 있습니다."돈이 모이는 일과 자신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글씨를 교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전국으로 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주식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사회적기업으로 전환도 고민하고 있다. 또한 수익금의 일부를 인천지역에 있는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그의 글씨 교정 방법이 궁금해 물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 초·중·종성으로 구성됐는데 자음과 모음의 거리를 자음 하나의 크기만큼 뗍니다. 그 사이에 종성의 자음을 넣는 거죠. 이렇게 표준 수치화해 기본이 갖춰지면 그것을 응용해 캘리그래피가 완성되는 겁니다."글씨 교정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그는 이 일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느낀다고 했다.
"농담으로, 우리 연구소에 오면 배우고자 하는 건 다 가르쳐준다고 해요. 심지어 댄스까지요.(웃음) 큰 욕심은 없어요. 많은 사람이 배우고, 필요한 사람에게 잘 쓰였으면 좋겠어요. 제 능력을 가지고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장 필요한 곳이 다문화가정이 아닐까 하고 재능기부를 하려고 관공서에 알아봤는데 쉽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장애 청소년에게 글씨 교정을 교육한 적이 있는데, 당사자나 부모가 아주 만족했죠.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