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본스타인은 미국인이며 연극배우로 살아온 인물이다. 직접 무대에 오를 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칼럼니스트로서 여기저기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수십 년간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그녀는 남자로 태어났으나, 37년이 지나고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성이 되었다. 케이트 본스타인의 책 <젠더 무법자>는 트랜스젠더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 젠더에 얽힌 사회적 통념, 이에 대한 생각을 글로 엮은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고뇌와 역경을 담은 이 책은 미국에서 학교 교재로도 쓰이며, 젠더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로도 인용된다.
트랜스젠더로 살아온 케이트 본스타인
본문은 저자의 삶에 대한 회상과 고백으로 일정 부분 채워진다. 남자로 태어나 살았던 유년기, 스스로의 성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시기의 기억, 성전환 수술을 받게 되기까지.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된 수술 내용에 이어서 그녀가 받은 멸시와 모욕적인 대우도 읽을 수 있다. 사실적 근거보다 혐오적인 감정에 근거한 차별에 저자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성소수자 권익 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했다.
'거세된 남성'으로 불리며, 생소하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는 일은 상당히 견디기 힘었을 것이다. 케이트 본스타인은 이 과정에서 발견한 생물학적 성별에 대한 편견을 지적한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문화적 성관념에 대한 이분법적 통념에 의문을 던진다.
문화가 "너는 이러이러한 존재다"고 말할 때 젠더가 지정된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에서 우리는 출생 시에 성별을 지정받는다. 한 번 젠더를 지정받으면 당신은 바로 그 젠더다. 젠더를 지정해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의사이며, 이 사실은 젠더가 얼마나 철저하게 의료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의사들은 신생아를 내려다보고는 "얘는 페니스가 달렸군, 남자애야" 아니면 "얘는 페니스가 없군. 여자애야"라고 말한다.이 과정은 질과는 거의 또는 전혀 상관이 없다. 페니스가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젠더 지정은 남근 중심적이며 성기 중심적이다. 다른 문화의 경우 그렇게까지 경직되어 있지는 않(았었)다. (본문 48쪽 중에서)저자는 젠더를 나누는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또 남성 중심의 관점으로 굳어 있다고 말한다. 트랜스젠더로 살아온 케이트 본스타인은 당시 미국 사회의 기준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질문한다. 문화와 성 정체성의 다양성을 모욕으로 채찍질하고, 오로지 남자와 여자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의 섭리'로 설파하는 분위기 말이다.
편견의 해체와 젠더 무법자본스타인은 젠더가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에서 그치지 않고, 남과 여로 나뉜 상태를 위계적 질서로 환원하는 체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미국 사회가 여전히 권위적이고, 밑바탕에 남성중심적 사고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고, 남성들이 허락한 틀에서 벗어나면 쉽게 비난받는 상황을 예로 든다.
저자는 이런 젠더 체제가 편견에 근거하기에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별로 누군가를 멋대로 규정하고, 생물학적 차이만으로 성별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 '젠더 무법자'는 이렇듯 굳어버린 인식을 깨트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양 쪽으로 쏠려있는 젠더 스펙트럼을 완화해야 이분법적 체제의 권력 게임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에는 회색에 대한 고려라고는 없다"고 말하면서 젠더가 억압적인 강요에 가깝다고 말한다. 인도의 '히즈라' 문화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정체성의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인정하며 받아들인다고 한다. 반면, 미국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를 불편하게 여기며 배제하려는 선에서 그친다는 지적이다. 집단의 경계만을 드러내는 선에서 그치는 젠더 개념이, 이런 상태로 존속되어야 하는지 묻는 셈이다
주장만큼이나 책의 구성도 흥미롭다. 400페이지 분량의 책은 수시로 글이 왼쪽과 중간, 오른쪽으로 번갈아 정렬 위치가 바뀐다. 책장 왼쪽에 자리잡은 글은 각종 문헌이나 발언을 인용한 것이고, 중앙에 쓰인 글은 저자의 주장을 담아 사실상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른쪽에 쓰인 글은 저자의 속마음, 본문보다 더 솔직한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본문의 마지막은 케이트 본스타인이 직접 쓴 연극 각본이 실려 있다. <숨겨진 아, 젠더>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성 관념에 대한 풍자가 돋보인다. "전 학교에서 현대 수학에 가장 크게 공헌한 건 영(zero)의 개념이었다고 배웠어요"라는 대사 뒤에 이어지는 상황은 '굳은 인식 너머의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를 재치있게 표현한다. 이는 저자가 주장한 젠더 체제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소수자를 향한 시선 돌아보기"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같은 아이 한 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1990년대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노래, 그룹 패닉이 부른 '왼손잡이'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과거 한국에서 왼손을 주로 사용하는 것을 '잘못된 행동'으로 간주하여 교정의 대상이었다. 불과 약 20년 전까지 말이다. 이제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은 사라졌지만, 어쩌면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지난해 6월 보수종교단체의 방해를 겪은 성소수자 축제 등의 사례를 돌아보자. 한국에서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와 양성애자를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냉담하다. 이는 최근 반기문 UN 사무총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나, 유럽을 포함한 서구 사회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며 변해가고 있는 현실과 비교된다.
"나는 스스로 성별을 노력해서 쟁취했다"고 말하는 케이트 본스타인은 과감한 태도로 화두를 던진다. '성 정체성 인식'의 과정이 개인의 성찰이 아닌 사회의 주입에 의존하는 1970년대 미국 사회를 꼬집은 것이다. 물론 책이 출간된 지 4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동성애는 치료대상인 정신질환이 아니다"라고 발표한 1970년대 미국의사협회 등 많은 연구결과가 쌓이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일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독자가 모두 동의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녀의 주장에 모두 고개를 끄덕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는, 트랜스젠더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소수자를 향한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쓰인 지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배경에는,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과 역할 강요가 뚜렷한 한국의 현실이 먼저 떠오른다. 또 서문에서 작가가 언급한 지난해 '서울시민인권헌장' 폐기의 사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 차별금지 조항'을 이유로 무산된 인권헌장 공포가 훗날 '왼손잡이 교정'처럼 웃음을 자아낼 일로 거론되지는 않을까? 차이를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혐오와 배제의 폭력성을 반성하지 못한다면 매일이 안타까운 역사의 연장선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가부장적 가치관과 폐쇄적인 성관념이 사라지지 않은 오늘날, <젠더 무법자>의 통찰은 한국 사회에도 필요한 사항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젠더 무법자>(케이트 본스타인 씀/ 조은혜 옮김/ 바다출판사/ 2015.3.20/ 1만 5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