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이맘 때면 들판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빈자리가 있었고 그 빈자리에 사람이 나타났다. 새파란 밀과 보리가 통통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에 이빨 빠진 옥수수처럼 뭉텅뭉텅 빠져 있는 빈자리. 그곳에도 드디어 농부들이 등장하는 때가 바로 4월 중·하순쯤이다. 못자리 물 잡는 때가 된 것이다.
보름이면 키워내는 모요즘 어디를 둘러봐도 못자리 하는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6~7년 전만 해도 순수 물못자리는 사라졌어도 띄엄띄엄 부직포 비닐못자리는 있었는데 깡그리 사라지고 없다. 묘판에 상토를 깔고 씬나락을 뿌려서 싹을 틔운 다음 논 못자리로 옮겨 부직포를 덮고 물길을 내는 것이 신기술이라고 떠들썩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래서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벼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되느냐고 하면 십중팔구는 6월이라고 말한다. 산간지방은 5월 말이고 빨라야 5월 중순쯤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모두 육묘장에서 모를 가져다 심는다. 일부 농가만이 씬나락을 갖다 주고 모를 키워 달라고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품종이 새로 공급되면 애써 받은 씬나락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벼농사가 전년도 10월에 시작됐다. 타작할 때를 1주쯤 앞두고 완숙 단계에 들어서는 벼를 베어내서 씬나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직 몇몇 겉잎사귀가 푸릇한 청장년쯤 되는 벼를 조심스레 베어서 천천히 말렸다. 그리고는 일일이 홀태를 이용해서 손으로 낟알을 훑어냈다. 탈곡기에 넣으면 요즘말로 스트레스 받을까 봐서다.
못자리 잡을 때가 되면 정성을 한껏 들인다. 일주일 동안 싹 틔우기를 하면서 20~25℃ 물에 온탕침지소독과 20% 소금물에 넣어 볍씨 비중가림를 한다. 씬나락 담그는 물은 2월에 내리는 눈을 모아 그걸 녹여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요즘은 딱 보름이다. 신청하면 딱 보름 만에 모판이 논으로 공급되는 세상이 됐다. 40일에서 50일 걸리는 모 기르기가 15일로 줄었다.
삿갓배미에서 논을 잃다자기 논 한 배미라도 장만하는 게 평생 소원인 시절이 있었다. 물길을 낼 수 있으면 물길을 내서, 없으면 둠벙을 파서라도 논을 만들다 보니 다랑논이 많이 생겼고 다랑논까지 만들다보니 손바닥만한 작은 논도 생겼다. 논이 얼마나 작았으면 전해오는 얘기 중에 '삿갓배미'라는 말이 있을까.
논두렁을 경계로 해서 그걸 논배미라 하는데 마을에서 먼 논을 외배미, 장구처럼 가운데가 홀쭉하면 장구배미, 아래쪽 논은 아랫배미, 사래가 길면 진배미라 한다. 어느 날 농부가 삿갓을 벗어 놓고 일을 하다가 자기 다랑논을 세어 보니 한 배미가 모자랐다고 한다. 몇 번을 세어 보다가 결국 지난 장마에 논 한 배미가 떠내려갔구나 하고 혀를 차며 삿갓을 들어 올리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손바닥만한 논은 삿갓배미라고 부른다.
다랑논의 발달은 이앙법, 다시 말해서 모심기가 보편화되면서다. 이앙법이 벼농사의 주류가 되기 전이라면 산골짜기에 다랑논을 만들어 벼를 심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앙법이 아니라면 직파를 해야 하는데 4월 중순은 너무 이르다.
<농상집요>라는 농서에 보면, 고려 말부터 모 심기가 있었다지만 이것이 크게 전파되지 못하고 조선 초기까지는 도리어 금지됐다. 그 이유는 모 심기 할 때 가뭄이 들면 죄다 모를 못 심으니까 나라 전체가 흉년이 드는 위험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를 심을 때는 한꺼번에 많은 물을 필요로 해서 물 부족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물못자리 중심의 이앙법이 확대되어 간 것은 모를 심을 때인 6월 중·하순까지 비어 있는 땅에 밀과 보리를 심는 2모작이 가능했던 것이고, 모 내기 직전에 논을 다시 갈아엎으면서 잡초제거가 용이했고, 모를 내는 6월이면 산천에 파랗게 자란 떡갈나무 잎이나 찔레 순, 버드나무 잔가지나 칡 끝 순을 잘라다가 논에 넣어 논을 기름지게 할 수 있어 벼 수확량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쉬운 논농사, 높아진 쌀 스트레스농사일을 하는 머슴이나 논을 부쳐 먹는 소작농들도 이앙법을 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머슴의 1년 품삯인 새경이 아무리 적고, 소작농의 소작료는 비싸더라도 2모작 하는 밀과 보리는 통째로 자기네가 다 가져 갈 수 있다 보니 모내기를 통한 2모작을 바랐던 것은 불문가지다.
요즘은 다시 벼농사의 직파가 관심을 끌고 있다. 어차피 2모작을 하지 않다 보니 인건비도 줄이고 벼의 생육도 튼튼해서 병충해에도 강한 직파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직파의 좋은 점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나는 특히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쌀 스트레스 저감 효과다. 직파 유기농 쌀을 사랑하는 이유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옛날에는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훨씬 힘들었다. 추수 끝나면 바로 논을 갈아엎어야지 이른 봄에 두어 번 논을 갈고 모를 심기 위해 써레질에 고무레질, 모 키우기에 모내기, 뜬 모 잡기에다 푹푹 찌는 하지 날에 세 벌 매기까지 해야 하는 논매기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요즘은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훨씬 쉽다고 말하는데 기계화와 농약 때문이다.
논농사가 너무나 쉬워져서 시골 할머니가 휴대전화 하나면 수십 마지기 논농사가 가능할 정도다. 로터리에 모심기와 농약치기, 타작이 전화 한 통화로 다 이뤄진다. 농사짓기 참 쉬워졌다. 값비싼 대가를 우리는 치르고 있다. 바로 쌀 스트레스다. 이 말은 새로운 개념이다.
우리는 아이를 키울 때 태교까지 한다. 임신 시기에 아이의 성향과 기질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청소년기는 물론이고 영·유아기 때의 경험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볍씨 단계부터 소독이라는 이름으로 농약에 절고 흙 한 톨 없이 허공 선반 위에 올려져서 싹이 트고 잎이 나서 자라는 육묘단계는 심한 쌀 스트레스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후에는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굉음을 내는 고속 승용이앙기에 매달렸다가 기계에 말려들어가 정신없이 땅 속에 꽂혀져서 자라서 된 쌀은 스트레스 총량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못자리 논에 무릎까지 꿇고 정성스레 모를 쪄서 짚으로 모춤을 묶는 농부들의 농요를 듣고 자라서 만들어진 쌀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한 포기 한 포기 못줄 따라 반듯하게 손 모로 심겨져 자라는 쌀과 어찌 같겠는가.
미국에 이어 중국과 호주, 뉴질랜드까지 맺게 된 자유무역협정 앞에 맨 몸으로 내몰린 쌀의 스트레스와 외로움은 어느 때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잃은 것과 찾아야 할 것들못자리를 안 하면 덩달아 하지 않는 게 많아진다. 신경 쓰이는 침종작업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씬나락 관리도 안한다. 씬나락 관리를 안 하니 집집마다 쌓여 있던 플라스틱 묘판도 사라졌다. 논 귀퉁이에 쌓아 놓고 푸른 가빠로 겹겹이 덮여져 있던 풍경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피사리도 사라졌다. 못자리에서 일일이 '피'라는 잡초를 가려내는 작업 말이다. 피와 벼를 구별하기는 참 어렵다. 다 자란 다음에야 마디도 다르고 키도 다르고 열매도 달라서 가려내기가 쉽지만 어린 새싹 단계에서는 아주 힘들다. 이를 가려낼 줄 알면 남의 집에 꼴머슴이라도 갈수 있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꼴머슴이란 예닐곱 되는 사내아이가 집안에 밥숟가락 하나 덜려고 남의 집에 꼴 베어주고 밥 얻어먹는 머슴을 말한다.
요즘 우리 식탁은 쌀밥과 김치만 우리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줄모와 손모도 사라지고 대안학교의 실습용 논에서만 특별행사로 겨우 명맥을 잇는다.
4월 중순이면 만물이 새 세상 만난 듯 활개를 친다. 그것들은 눈에 다 보인다.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더 넓고 깊게 생명들이 왕성하다. 천수답 다랑논이나 둠벙에는 개구리들이 알을 깐다. 못자리 하려고 물 잡는 논에도 알을 까놓는다. 둠벙이 사라지고 물못자리 사라지니 개구린들 어찌 멀쩡하랴. 한여름 밤 하늘에 닿을 정도로 요란하던 개구리 울음 사라지니 시골의 운치와 정서도 사라졌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만큼 농사도 빠르게 달라지는데 속도도 속도려니와 농사의 방향마저도 돈벌이와 능률과 기계전자화라는 세상의 방향을 좇으니 그 끝은 어디가 될지 몹시 두렵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살림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