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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약은 잘 먹이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솔이 열이 높아서요."

한창 바쁜 오후에 막내 솔이를 맡긴 읍내 어린이집에서 담임교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의도를 알기 어려워 당황했다. '약은 잘 먹이지 않는'이라는 말이 걸렸다. 당장 데려가라는 이야기일까 고민했다. 해열제가 있다고 했다. 먹여도 되느냐는 말이었다. 조금 더 경과를 두고 봐서 열이 더 높아지면 그때 먹이시라고 했다.

열나는 몸에서 37도나 38도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알았다며 다시 경과를 보고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피곤했다. 교사 입장에서는 '무슨 부모가 애가 아픈데 즉각적인 조처를 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고, 내 입장에서는 '아프면 열이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무조건 약부터 먹이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몇 년 전 의약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에서 한국의 처방이 다른 나라에 비해 무척이나 남용되고 있음을 본 적이 있다. 그전에도 약이나 병원에 거리를 두던 편이었다(이는 집안에 의사가 세 명이나 되는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내 아이를 돌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병원체계는 영리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나친 진단과 이에 대한 과한 처방을 의료소비자가 골라서 선택할 방법이 거의 없다. 고로 웬만한 증상에는 병원을 찾지 않는 것이 유일한 대응법이라는 판단에서다.

내가 약과 병원에 거리를 두는 이유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표지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표지 ⓒ 느리게읽기
다행히도 요즈음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책이 있다. 그것도 믿을 만한 의사가 쓴 책들이다. 한 권은 국내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상당한 경력의 정형외과의가 쓴 책, 또 한 권은 미국 버몬트 주 화이트정션의 재향군인병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의사가 쓴 책이다.

이상하게도,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의사들은 의료소비에 있어서 일반인들과 다른 선택을 보인다. 예를 들면, 건강검진 받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거나 인공관절이나 척추, 백내장, 스텐트, 임플란트 등등 그 흔한 수술 받는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심지어 항암치료 참여율도 떨어진다. 요컨대 검사도 덜 받고, 수술도 덜 받고, 몸을 사린다.

주위에 가족이나 친한 친구 중에 의사가 있어서 질문해본 사람들은 나의 이런 지적에 공감할 것이다. 어떤 질문이 날아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괜찮아. 그냥 지내봐. 좋아질 거야." 이런 양상은 의사들 자신의 전문과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정형외과 의사들이 무릎 수술이나 어깨 수술을 받는 일은 그들 사이에서 특이한 뉴스거리가 될 만큼 희귀하다.

비유하자면, 마치 손님들에게는 매일 기름진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일급요리사가 정작 자신은 풀만 먹고 산다고나 할까. 왜 그럴까? 왜 의사들은 자신의 환자들에게 권유하는 처방을 자신을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을까?- <의사는 수술 받지 않는다> 서문 중

선입관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내 눈에는 의사들이 꽤 노련한 척 권위를 내세우는 (물론 안 그런 의사도 많이 있다)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엊그제 열이 오르고 콧물이 가득한 막내를 데리고 간 소아과. 몇 년간 처방전만 꼬박 모아놨다고하면 내가 처방을 내려도 다르지 않을 내용의 진료와 처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내 신경을 긁는 한마디.

"왜, 인제 데리고 와? 진즉 좀 오지."

의사가 아이의 귓속을 들여다보면 중이염이 있고, 가슴의 소리가 좋지 않으면 미세기관지염이 의심되는 것이다. 증상이 계속되면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진다고 하지만 그 확률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항상 비상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일까.

그저, "이거 심해지면 입원해야 돼요." 정도가 너그러움의 표현인 듯 보인다. 부모 입장에서는 죄인이자 좌불안석이 된다. 게다가 의사의 권위를 거스르는 것은 '이상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감히 의사가 말하는데 얼마나 잘났기에 그것을 거부하느냐는 느낌이랄까.

의사에게 책잡히지 않으려면 조그마한 증상에도 즉각 병원에 데리고 와야 하는 것이다. 이웃집 준이(가명)네는 이를 잘 실천하고 있다. 그 집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애가 셋인데 한 달에 서너 번 이상 소아과에 방문한다. 특히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진료받고 주사맞히고 약 먹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며칠 쉬면 낫는 병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일까.

이런 말에 일부 부모들은 맞장구를 치지만 정작 그네들도 "이러다가 병을 키우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는 가족의 질타에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가벼운 병도 꼭 화학약품과 항생제로 다스려야 할까.

나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볼에 구멍이 나서 열두 바늘을 꿰매었을 때도 입원하지 않고 통원 치료를 했고, 고전염성 바이러스로 인한 증상이나 맹장염 등도 없었으니 특별하게 심각한 검진을 받지 않은 탓이라 생각한다.

그런 내가 턱 옆이 심하게 부었던 적이 있는데 가까운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도시의 병원을 소개해주고 그 병원에서는 대학병원을 추천했다. 왜 며칠 두고보자는 의사는 하나도 없이 큰 병원을 바로 추천하는 것일까? 그냥 며칠 경과를 더 두고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 성격을 잘 아는 아내가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두려움이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거울을 볼 때마다 드러나는 혹이 점점 커지고 딱딱해지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혹시 김일성처럼(그는 뒤쪽에라도 있지) 되는 것은 아닐까 내 미래의 모습을 두고 상상이 나래를 펼쳤다.

하루도 못 버티고 인근 대학병원(이라지만 차로 70킬로미터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외래에서 진료받자마자 입원을 추천했다. 그런데 병실을 얻기 위해서 응급실을 이용하라는 조언을 했다. 저녁에 다시 와서 응급실에서 두 시간여를 기다리고 영문도 모르는 CT까지 찍고 입원할 수 있었다.

"각종 암에 가장 빨리 걸리는 비결은 선별 검사를 받는 것"

 과잉진단 책표지 그림
과잉진단 책표지 그림 ⓒ 진성북스
"건강을 유지하는 최상의 비결은 심장병, 자폐증, 녹내장, 혈관 이상, 골다공증 혹은 각종 암을 미리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의료계는 조기 진단의 부정적인 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조기 진단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심장병, 자폐증, 녹내장, 혈관 이상, 골다공증 혹은 각종 암에 가장 빨리 걸리는 비결은 선별 검사를 받는 것이다."- <과잉진단> 서문 중

무려 일주일을 환자 같지도 않은 환자행세를 했다. 덕분에 휴가처럼 쉬기는 했다. 책도 여러 권 읽고 영화도 여러 편 보고. 하지만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입원해서 매일 항생제 듬뿍 링거를 맞으며 지내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병원 밥을 세 끼 꼬박 챙겨먹고 주변에 나보다 심각한 수술을 받고 누워있는 룸메이트(?)들 보기도 낯부끄러웠다.

더더군다나 참을 수 없는 흡연 욕구가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치렁치렁 링거줄을 매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병원 뒤쪽 으슥한 곳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어 무는 일. 더 놀라운 것은 나보다 훨씬 심각해 보이는 얼굴에 반쯤 붕대감은 환자가 내 옆으로 와서 담배를 같이 피우는 모습을 볼 때였다.

병원은 가고 싶지 않다. 병을 만드는 곳처럼 느껴졌다. 퇴원하고 꼭 다시 오라는 다짐에 방문해 한 시간여를 기다렸더니 "아 좋아졌네요." 한마디였다. 일 분도 걸리지 않았던 진료에 진료비 삼만오천 원을 내야했다. 왕복 교통비만 해도 이만 원이 넘는데 무척이나 허탈한 하루가 되고 말았다.

병원과 수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작년에 어머니가 입원했다. 소화가 잘 안 되고 더부룩해서 받은 검진 결과 때문이었다. 조직 검사까지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수술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위에 암이 있다고 했다. 수술할지 말지 고민하던 어머니는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그리고 위 전체를 떼어냈다.

어머니는 3개월여를 "사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며 후회 섞인 이야기를 했다. 그냥 수술 안 하고 먹고 싶은 대로 잘 먹고 지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이야기다. 물론 암이 퍼져서 그 때문에 죽게 된다면 무슨 소용인가. 다행히 일찍 발견해 수술해서 삶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생각해본다. 온갖 검진을 통해 병을 일찍 발견해내는 것이 나의 삶과 건강에 유익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잘 살다가 아주, 매우 이상할 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결과가 '악성'이라면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 현대의학의 미완의 기술에 내 몸을 온전히 맡길 것인가. 남은 생의 보다 알차고 흥미로운 일을 위해 즐기다 마무리 할 것인가.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 현직 정형외과 의사가 들려주는 유쾌 상쾌 통쾌한 촌철살인 의료사용가이드

김현정 글 그림, 느리게읽기(2012)


#의료체계#과잉진단#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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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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