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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창업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특히 '스타트업(Start-up)'은 청년들의 아이디어로 승부할 수 있는 새로운 창업 형태다. 우리나라는 현재 '창조경제'의 기치 아래 스타트업 창업이 장려되고 있다. 김주윤 닷(dot)대표도 이 물을 타고 열심히 노를 저었다. 미국에서 2전3기 끝에 트럭공유업체 '왜건(wagon)'을 공동창업한 경험을 살렸다.

닷(dot)은 점자 스마트 워치를 개발한 유망한 업체다. 현재 기업은행을 비롯한 기업과 업무협약을 비롯해 공공기관과의 협약을 목전에 두고 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주윤 닷(dot) 대표를 만나 스타트업 도전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4월 1일 그의 사무실에서 있었다.

닷(dot) 김주윤대표
 닷(dot) 김주윤대표
ⓒ KBS1TV 방송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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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실패 후 도미

김 대표는 군인을 꿈꿨다. 군인정신이 투철한 장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진학에 실패하면서 군인의 꿈을 접었다.

"당시에는 암담했어요. 장교가 되고자 열심히 노력했는데 떨어진 거예요. 막막했죠."

고등학교 졸업일은 다가오고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그의 눈에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처럼 나도 좋은 사업가가 되고 싶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사업을 하겠다는 아들을 아버지는 말렸다. 국내에서 사업하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당시(2009년)만 하더라도 전환사채니 연대보증이니 하는 게 있었어요. 사업이라는 게 빚을 내서 하는 게 아니라 투자를 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는 투자란 개념이 빚과 동일시됐었죠."

아버지는 매일 피 말리는 불안감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결국 사업가가 되는 걸 허락했지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미국 대학입학이었다.

"거기서 더 큰 세계를 보라고 하셨어요. 미국이 사업을 배우기 좋은 곳이니 공부해 보라는 거였죠."

그 길로 도미했다. 2년간 준비해 워싱턴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그가 찾은 건 창업클래스였다.

"대학마다 스타트업 창업 클래스가 있더라고요. 제 목적은 처음부터 창업이었으니 찾아 들어갔죠."

- 어떤 걸 배우셨나요?
"창업에 관한 자세를 배우죠. 우리나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숨기려고 하잖아요. 거기서는 널리 알리라고 해요. 바보 같은 아이디어는 누군가 베끼지 않으니 차라리 조언을 구해 보라고요. 그러면 더 좋은 아이디어로 돌아온다고 가르쳤죠."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 청년들은 자연스레 창업을 꿈꾼다. 졸업할 나이쯤에는 한 번씩 창업을 해본다는 게 김 대표의 말이다.

"'망하면 어때? 다시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친구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고 하면 사업에 뛰어들어요."

2전 3기 끝의 성공

그도 창업을 시도했다. 처음 눈여겨본 분야는 청년 실업이었다. 이를 도와주고자 만든 회사가 드림 링커스(Dream Linkers)였다. 페이스북처럼 구직자가 자신의 활동을 사진으로 올릴 수 있게 만든 사이트였다. 인사담당자는 해당 사이트에서 필요한 카테고리를 지정하면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가령 '디자인 컨퍼런스 5회 이상 참여'란 항목을 지정하면 해당 활동을 한 학생들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이디어 하나를 가지고 '스타트업 위크엔드'를 찾아갔다. 이 행사는 주말 동안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는 창업가, 개발자, 디자이너들이 모여 팀을 구성하게 도와주는 행사다.

"가면 명찰을 나눠줘요.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가, 기술을 가진 개발자,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디자이너 등등. 명찰을 달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1분 스피치를 해요. 맘에 들면 포스트잇을 붙이고요."

가장 많은 포스트잇을 얻은 상위 10명은 팀을 짤 수 있다. 김 대표도 고군분투했지만 10명에는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서로 얘기가 통한 개발자가 팀을 꾸리자며 다가왔다.

"익스피디아(Expedia)와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에 있었던 인도 프로그래머였어요. 바로 지분을 나눴죠."

투자금을 얻기 위해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파운더 인스티튜트(Founder Institute)를 찾았다. 하지만 심사에서 탈락했다.

- 왜 탈락했죠?
"너무 패기로만 밀어붙였죠. 아이디어는 있는데 수익을 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없었고요. 인사의 중요성도 배웠어요. 인도 프로그래머가 결혼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는 더 일을 오래 하고 싶은데 그 친구는 5시만 되면 집에 들어가 아내를 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불화가 생겨 팀이 깨졌죠."

그는 좀 더 배울 시기라고 생각했다. 마침 중소기업청에서 '글로벌청년활성화사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 사업을 신청해 합격했다. 3개월 동안 실리콘밸리로 연수를 갈 기회를 얻었다. 그때의 소회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터죠. 어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업체가 생겨나면 다음 날에는 그와 비슷한 업체가 수십 개 생겨 버려요. 정신 바짝 차려야겠더라고요."

사업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배웠다. 창업자가 개발할 줄 알아야 된다는 그의 지론이다. 그렇게 다시 2번째 창업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유학생에 눈길이 갔다.

"현지 유학생과 유학 예정자들을 멘토-멘티로 이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래서 '멘토라(Metora)'란 사이트를 만들었어요. 프로그램을 직접 제가 짰죠."

시장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주위 유학생들에게 아이디어와 사이트를 보여주며 의견을 들었다.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이란 형태예요. 먼저 시제품을 만들고 시장 반응에 따라서 교정하는 거죠. 이것도 연수 때 배운 거예요."

유학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멘토로 참여하겠다는 사람들도 수십 명이었다. 유학 예정자들도 값비싼 중개료를 내지 않고 현지 유학생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대로 창업만 하면 될 듯했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유학생들은 학생비자를 받잖아요. 그런데 학생비자로는 일을 할 수 없어요. 직업을 가지면 불법이에요."

- 아르바이트로는 가능하지 않나요?
"미국은 비자법이 엄격해서 학생비자로는 아르바이트도 불가능해요."

대안으로 모색된 곳은 호주였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가 미국에 있는 마당에 호주에서 사업을 벌일 수는 없었다. 결국 야심차게 시도한 2번째 도전에 실패했다.

-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전혀요. 가슴은 아프지만 제가 잃을 게 뭐가 있겠어요. 미국을 대표하는 IT기업들도 이런 실패를 통해 만들어진 건데요. 저도 그런 과정이라고 봐요."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같이 공부하던 챙이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함께 팀을 꾸려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었죠. 그때 파운더 인스티튜트에서 제 멘토를 해주던 사람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같이 창업해 보자고요."

미국에 남는 유휴트럭들이 많다.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것이 멘토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김 대표도 공유경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 원래는 뭘 하고 싶었어요?
"미국판 '중고나라'라고 할까. 자신이 가진 물건을 서로 물물교환하거나 나눠쓰는 그런 걸 하고 싶었어요. 멘토의 아이디어가 저와 비슷했죠."

이 아이디어로 결국 5000만 원의 투자를 받았다. 3번의 도전 끝에 스타트업 업체를 창업했다.

"정말 기뻤어요. 3번의 도전 만에 창업한 거니까. 이곳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어요."

점자 스마트 워치 '닷'
 점자 스마트 워치 '닷'
ⓒ 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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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올 때 노를 젓다

창업에 성공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 실적이 안 좋았나요?
"제가 생각하던 것만큼 나오진 않았어요. 그리고 완전히 저만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잖아요."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성공해 보고 싶었다. 도전의식이 한껏 고취될 무렵 바다 건너 한국의 소식이 들렸다.

"정부가 스타트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느 때보다 창업하기 좋아졌다는 거죠."

그는 한국 스타트업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에게 시장 현황을 알아봤다.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단군 이래 창업하기 가장 좋은 때다.' 그는 바로 한국에 들어왔다. 직접 눈으로 시장 현황을 보고 싶었다. 시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규제가 풀리고 돈이 넘쳤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됐다. 그 길로 귀국을 결심했다.

"같이 일하고 있던 챙에게 말했어요. '기반을 잡고 있을 테니 연락하면 바로 넘어와.' 그리고 귀국했죠."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노 저을 아이디어도 있었다. '점자 스마트 워치'였다.

"미국에서 시각장애인을 만난 적이 있어요. 점자책을 봤는데 엄청 큰 거예요. 성경을 점자로 만들면 22권이나 된다고 하잖아요. 전 당연히 아이패드 같은 소형화된 점자기기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없는 거예요."

기껏 찾은 점자기기는 크고 무거웠다. 가격도 400만 원대에 형성돼 있었다. 그나마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그 혜택을 받는 건 소수에 불과했다.

"사업하면서 만난 시각장애인 중에는 10년째 점자기기 지원금을 신청한 사람도 있어요. 그만큼 시각 장애인들에게는 고가의 기기였죠."

국내 시장규모는 3000억 원이었지만 이 때문에 보급률은 5%에 지나지 않았다. 김 대표는 무릎을 탁 쳤다.

"휴대하기 간편하면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알려주는 점자기기. 이 아이디어를 상품화하면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대박도 나고. 일석이조구나 싶었어요."

미국에 있던 챙을 불러들여 그를 포함한 5명의 팀을 구성했다. 시장에 나온 400만 원짜리 점자기기를 뜯었다. 밤낮을 바꿔가며 소형화 작업에 매진했다.

"사무실이 경기도 용인에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 미친 듯이 일했어요. 6시간 자고 나머지는 죄다 제품 개발만 했죠. 7개월을 매달렸어요."

결국 자석을 이용해 스마트워치 형태로 소형화했다. 이전 실패의 노하우를 한껏 발휘했다. 시제품을 미리 만들어 300명의 시각장애인들을 만났다.

"시각장애인들이 기기를 보고 놀라워하더라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도 있었어요. 점자요철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든지, 느낌이 너무 거칠다든지. 직접 사용하는 시각장애인들만이 알 수 있는 문제였죠."

시제품이 점점 완성돼가면서 투자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김 대표는 여러 스타트업 투자 대회에 지원했다. 특히 KBS에서 방송한 '황금의 펜타곤2'에서는 우승했다. 우승 상금 1억 원과 4억 원의 사업자금 대출 혜택을 받았다.

"혜택도 혜택이지만 홍보 효과도 누렸어요. 덕분에 투자금 모으는 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았죠."

- 얼마나 모으실 생각이세요?
"시드 단계(스타트업을 갓 시작한 단계)예요. 양산을 위해 5.5억 유치를 목표로 하고있어요. 이번 연말에 제품이 나오거든요. 20만 원대에서 가격이 책정돼 시장에 나올 거예요. 그러면 한국에서의 반응을 토대로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진출할 겁니다. 어딜 가나 점자는 필요하잖아요."

청년일 때 도전해야 한다

- 이젠 탄탄대로만 남았군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미국에서는 그러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부족해요."

- 사람이요?
"인재죠. 스타트업 업체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 왜 이렇게 안 들어오는 거죠?
"아무래도 스타트업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좀 알고 온다는 사람도 리스크를 감수하지 못해서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월급보다는 지분을 가지고 큰 미래를 보며 뛰어드는 건데 아직은 인식이 안 바뀌었나 봐요."

그는 국내 스타트업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스타트업 업체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상장하거나 M&A하거나.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알던 선배가 1000억 원에 자기 회사를 판 적이 있어요. 그러면 대박인 거 같죠? 그런데 선배는 '중박'쳤다고 해요. 그만큼 미국에서는 M&A가 큰규모로 이루어지는걸 많이 보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M&A 시장은 열악하다. 대기업들이 스타트업 업체 인수에 적극적이지 않다.

"우리 기업들도 인수대금을 많이 써야 해요. 그래야 그걸 보고 사람들이 모이죠."

프로그래머에 대한 대우가 열악한 것도 문제점으로 꼽았다. 미국에서 프로그래머는 소위 '천재'로 대우받는다고 한다.

"구글과 같은 IT 회사들은 프로그래머들의 연봉이 8000만 원이 넘어요. 그만큼 대우를 해주는 거예요. 그들이 내는 아이디어로 더 큰 이익을 보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프로그래머의 대우는 정말 열악해요. 인재들이 하려고 하겠어요?"

- 안 하겠죠.

김 대표는 컴퓨터에서 연세대 강연자료를 띄웠다.

- 강연 자료군요?
"몇 군데 대학에서 강연해 달라고 저에게 요청이 들어와요. 그때마다 거절하는데 여기서는 했어요. 공대생 300명이 듣는다는 얘길 듣고요. 그들 중에 혹시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해서요."

- 많이 관심을 가지던가요?
"그럼요. 아무래도 도전하는 일이잖아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우리나라가 열악한 면이 아직 있지만 저처럼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 또래 청년들도 같이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성공과 함께 저의 성장도 따라오잖아요."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김주윤, #스타트업, #도전,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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