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야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있다. 이전에 보르헤스 소설의 레퍼런스 번역본으로 통하고 있던 황병하의 번역본을 사놓고 몇 페이지 이리저리 들춰보다가 말았다.
황병하 번역은 부사와 형용사와 동사의 무게가 모두 무거워 감당하기 힘들었다. 각각의 단어마다 강세가 찍혀 있어 문장이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하고 종이 바닥에 바싹 붙은 채 납작해져 있는 모양새랄까. 이 문장들을 내가 손수 일으켜 세워 해독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새로 나온 송병선 번역본은 좀 더 잘 읽힌다. 낡고 거추장스러운 한자어의 사용이 줄어들었고 덕분에 문장 자체가 날렵해졌다. 상대적으로 고색창연한 맛은 황병하 번역에 비해 부족하긴 하다.
무엇이더 좋은 번역인지는 모르겠다. 난 번역된 한국어 문장만을 볼 뿐이다. 난 번역에 관해 이야기 할 능력이 없다.
이 소설집 가운데서 읽고 곧장 사랑에 빠졌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대해서 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화자는 프라이 벤토스란 동네로 휴가를 보내러 온다. 벤토스에 살고 있는 사촌과 만나 함께 걷는다. 도중 한 청년을 만난다. 사촌은 청년에게 시간을 묻는다. 청년은 답한다. "베르르도 후안 프란시스코 청년, 8시 4분 전이야." 사촌은 화자에게 알려준다. 이처럼 괴상한 대답을 하는 저 청년은 자기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레네오 푸네스라고.
3년 뒤 화자는 벤토스로 돌아온다. 화자는 사람들에게 '정밀 시계와 같은 푸네스'에 관해 묻는다. 푸네스가 말에서 떨어지는 불행한 사고로 반신불수가 돼 침대에 누워있다는 대답을 듣는다. 화자는 심난한 마음을 달래고 푸네스에게 라틴어책 두 권, 퀴셰라의 <시작법을 위한발걸음>과 플라티니우스의 <박물지>를 빌려준다.
며칠 뒤 화자는 푸네스의 집으로 책을 돌려받으러 간다. 화자는 라틴어를 전혀 모르던 푸네스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운 채, <박물지>에 나온 구절을 통째로 암송하고 있는 걸 본다. 푸네스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 이후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됐다고 말한다.
"나 혼자 지니고 있는 기억이 이 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인간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억보다 많을 거에요."(본문 143~144쪽) "우리는 한눈에 탁자 위에 있는 세 개의 컵을 감지하지만, 푸네스는 포도 덩굴에 달린 모든 포도 알과 포도줄기, 그리고 덩굴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1882년 4월 30일 동틀 무렵 남쪽 하늘의 구름 모양을 알고 있었으며, 기억 속의 구름과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어느 책의 가죽장정 줄무늬, 혹은 케브라초 전투 분야의 네그로 강에서 어떤 노가 일으킨 물보라를 비교할 수 있었다."(본문 143쪽)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기억의 가장 기본적인 요체는 선별작용이다. 우린 중요한 기억은 완벽히 복기할 수 있도록 머리 깊숙이 저장해둔다(사실 이 기억들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하찮고 작고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은 머리 주변부에 남겨둔채 곧잘 잃는다. 기억의 중요성에 따라 우리 뇌에 서로 다른 강도의 흔적을 남기며 저장을 해두는 셈이다.
반면에 푸네스는 '모든 것'을 '완전'히 기억한다. 이렇게 기억한다는 건 모든 감각과 인상과 세부 사항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송두리째 기억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보자. 푸네스는 자기 집 강아지 성기 끝 부분의 털이 노랗게 뭉쳐 말라 붙어 있는 오줌 자국을 본 순간과 9·11 테러 당시 비행기가 빌딩에 맹렬히 돌진해 외벽을 부수며 수천 명의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을, 같은 인상과 감각의 강도로 기억한다.
미세한 털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각도로 구부러지고 눌어붙어 있는 모양, 어떤 사람이 무슨 자세로 건물 몇 층에서 몇 시에 떨어졌는지 같은 세부사항들을 모조리 포함한 채 말이다.
푸네스의 기억에는 위계(位階)가 없다. 경험되는 감각과 인상과 세부사항들을 중요성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위계를 세워 저장하고 잊어버리는 선별 작용이 없는 기억은, 기억이 아니라 광포한 기록이다. 사실상 푸네스는 아무것도기억하지 못한다.
차이점들만 보는 푸네스, 죽음"그에게는 일반적인 사고, 즉 플라톤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라는 속(屬)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했다."(본문 146쪽)인간의 사고란 추상화와 일반화의 산물이다. 김광현이 감기에 걸렸고 이명박이 감기에 걸렸고 김영삼이 감기에 걸렸다 치자. 의사와 과학자들은 이들 세 명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 끊임없이 나오는 기침, 이따금 나오는 콧물, 약간의 두통 따위를 관찰한다. 이와 함께 이들의 몸속에서 감기 바이러스를 찾아낼 것이다. 이렇게 개별 개체들에서 공통된 점을 뽑아낸 다음 '아,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A'에 걸렸구나' 하고 이 A에 '감기'란 이름을 붙이고 감기의 개념을 형성한다.
푸네스는 이 같은 추상화와 일반화가 불가능하다. 푸네스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공통점을 보아야 할 곳에서, 오로지 차이점만을 본다. 푸네스는 세 명에게 공통된 증상들과 함께 김광현에게만 일어나는 특유의 미세한 손 떨림 증상을 볼 것이고, 이명박만 남모르게 잠깐씩 겪다가 회복하곤 하는 청각 능력의 부분적인 손상을 관찰할 것이고, 김영삼만 끙끙 앓고 있는 아주 느리게 진행하는 엠자 탈모를 본다.
이렇게 명백히 다른 것에 푸네스는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푸네스는 증상의 관찰과 연구에 기초한 공통된 교집합으로서의 감기가 아닌 김광현에게만 고유한 '감기A'를, 이명박만의 '감기Z'를, 김영삼의 '감기G'를 본다.
"나는 그때 밤새도록 내게 이야기했던 목소리의 얼굴을 보았다. 1868년에 태어난 이레네오는 열아홉 살이었지만, 내게는 이집트보다 더 오래되고 예언서나 피라미드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동상처럼 근엄해 보였다. 나는 내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나의 몸짓 하나 하나)가 그의 무자비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쓸데없는 몸짓들을 증식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레네오 푸네스는 1889년에 페울혈로 세상을 떠났다."(본문 148쪽)보통의 사람들에게 현재란 과거로부터 떠밀려가고 미래는 무의지 적으로 점유되는 과정일 터. 때문에 과거와현재와 미래는 구별 불가능하게 엉겨 붙어 있다. 우리는 현재를 힘들여 의식할 필요 없다. 우리는 현재, 인간이 늘 그렇듯 적당히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잊으며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푸네스는 만분의 1초보다 더 잘게 쪼개진 원자 수준의 시간단위로 밀려 들어오는 무한에 가까운 경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탁할 곳을 찾지 못하고, 부서진다. 소설에서 푸네스는 페울혈로 죽는다. 내가 보기엔 푸네스는 모든 것을 옮기고 베끼는 자신의 기록능력에 파묻혀 죽는다.
덧붙이는 글 |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송병선 옮김 / 민음사 펴냄 / 2011. 10 / 1만1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