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라고? 책 제목이 호기심을 당긴다. 작명소를 하시나. 표지를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시골에 사는 할머니인가 보다. 할머니가 앞에 있는 작은 갈색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할머니는 이 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 딱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볼 때의 표정이다. 옆에서 푸른 자동차가 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차가 어떻게 보냐고? 그림 속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보닛 부분이 꼭 사람의 눈, 코, 입처럼 보여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꼭 "할머니는 내가 지키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표지 속 장면에 자꾸 눈길이 간다. 수채화 풍의 정겨운 그림이 말을 건넨다. 이름 짓는 할머니의 사연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이럴 땐 "네, 궁금해요."라고 크게 대답할밖에. 그리고선 책을 펼친다. 첫 문장이 제목을 반복하고 있다.
'이름 짓기를 무척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도대체 어떤 이름을 짓는지 봤더니 낡은 자가용에게는 '베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단다. 표지에 나온 바로 그 차다. 그뿐 아니다. 할머니가 앉아서 쉬는 헌 의자에게는 '프레드'라고, 할머니가 오래도록 살아온 집에는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 물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할머니구나.
그런데 할머니가 모든 물건들에 이름을 지어 주는 건 아니다. 할머니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들에게만 이름을 지어 준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를 친구가 없는 게 싫어서 할머니가 이름 짓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친구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외로운 일상을 견디는 방법이 이름 짓기였던 것이다. 이름 지어준 것들보다 오래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행복해하면서 할머니는 단조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사는 집, 타는 차에 이름을 붙이던 할머니그러던 어느 날,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할머니 집 앞에 나타난다. 한참 동안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햄 한 덩어리를 꺼내와 강아지에게 먹인다. 그렇다고 집 안으로 들이지는 않는다. 베티도, 프랭클린도, 프레드도 강아지를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핑계고 할머니가 내키지 않았던 거다. 강아지는 할머니보다 오래 못살 확률이 높으니까. 당연하다는 듯 강아지에게는 이름을 지어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매일 찾아오는 강아지에게 매번 먹이를 준다. 이제 사건이 발생한다. 날마다 찾아오던 강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네 집에 오지 않은 것이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문득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다 못해 점점 슬퍼진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에는 갈색 개를 찾아 나선다.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림책할머니는 이름도 없는 갈색 개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답은 꼭 책을 보고 확인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안 봐도 빤하다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쉽게 답을 유추할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노상 당부하지 않는가.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답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아련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할머니의 쓸쓸함이 가슴으로 다가올 것이다.
혹 떠오르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나 이웃에 홀로 사시는 노인분 등. 그분들께 갈색 개가 할머니에게 했듯이 따뜻한 온기를 전해보자. 깜짝 전화도 좋고, 다정하게 건네는 인사도 좋겠다. 그림책 속 할머니는 갈색 개를 찾아다니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들을 만난 게 큰 행운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인연을 맺는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짧은 그림책 한 권이 삶의 깨달음을 전한다. 책 뒤표지에 '칼데콧 상과 뉴베리상을 각각 두 번씩 수상한 작가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림책'이라고 홍보하고 있는데 큰 상을 받을 만하다.
'이름'이 갖는 힘책을 다 읽고서 동시 한 편이 생각났다. <아무도 내 이름을 안 불러 줘>라는 시집에 실린 '이름'이라는 시다. 초등학교 1학년이 썼다.
"날마다 아빠랑 엄마는 누나 이름만 부른다. 아빠는 엄마를 "태인아." 하고 부르고 엄마는 아빠를 "태인이 아빠." 하고 부른다. 우리 집에서 내 이름은 아무도 안 불러 준다. 내가 불만을 나타내서 이제부터는 아빠를 부를 때 내 이름을 앞에 붙여서 부른다고 엄마가 그랬다."엄마 아빠에게 이름이 불리지 않는 지은이가 많이 속상했나 보다. 아이는 그 불만을 가슴에만 담지 않고 부모님께 토로한다. 왜 내 이름은 안 불러 주냐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의 부모님은 뜨끔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그런 것에도 서운함을 느끼는구나. 그러면서 부부는 대화를 나눴을 테고 아이가 만족할 만한 해결책도 낸다. 앞으로 지은이는 엄마가 아빠를 부를 때마다 씩 웃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이름을 듣고서.
우리는 사람들과 이름을 부르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한층 가까워진다. 김춘수는 그로써 그의 '꽃'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름은 우리가 의미 있는 존재임을 나타내주는 표상이다. 너는 이 세상에 살아갈 만한 소중한 사람이야 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에서 할머니가 물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니까 꼭 살아있는 것 같고 정감이 간 것처럼. 그게 바로 '이름'의 힘인 게다.
아이와 이름 짓기 놀이를아이와 함께 할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아이의 이름은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또 어떤 뜻이 담겼는지 일러주자. 삼행시 짓기 등을 통해서 아이 나름대로 자기 이름에 의미를 붙여하는 놀이도 할 수 있다. 그리고선 아이가 좋아하는 물건들에도 이름을 붙여보게 하자. 어른들은 생각 못하는 기발한 이름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고서도 시간이 남는다면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에게도 이름을 지어주는 건 어떨까. 책 어디에서도 할머니의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건 독자들이 지어 주라는 작가의 미션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름을 지으면 이름을 짓기만 했지 자기 이름이 불리는 걸 듣지 못하던 할머니가 그림책에서 나와 빙그레 웃을지도 모른다. 그 웃음을 상상하니 갑자기 엄마도 보고 싶고, 아이도 생각난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 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글: 신시아 라일런트 그림: 캐드린 브라운 옮김: 신형건 출판사: 보물창고 정가: 12,000원 출판연도: 2004
이 글은 개인 블로그 책 볼래, 사진 찍을래?(blog.naver.com/jjung9110)에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