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집이나 직장에서 은행, 증권사 계좌를 열 수 있습니다."지난 18일 금융위원회는 제3차 금융개혁회의에서 '계좌 개설시 실명확인 방식 합리화 방안'을 포함한 새로운 금융서비스 창출 방안을 심의·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올 12월 은행권을 시작으로 창구방문 없이 계좌개설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비대면 본인 확인을 위해선 해외에서 검증된 비대면 확인 방식(신분증 사본 제시, 영상통화 등)을 적용하는데,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중복확인하여 명의도용 금융사기 등을 방지한다고 금융위는 밝혔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왜 갑자기 비대면 계좌개설?"이라는 의아함이 들 만한 뉴스다. 정치권은 성완종 리스트, 야권분열, 연금개혁 등으로 바람 잘 날 없고, 경제권에서도 여전히 경제위기 이야기만 나오고 있는 오늘날. 왜 정부는 이런 '뜬금없는' 정책을 발표한 것일까.
정답은 단순하다. '창조경제' 때문이다. 미국의 페이팔, 중국의 알리바바 등의 성공과 성장을 보며 새로운 먹거리 산업을 찾고 싶어한 정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전 국민 앞에 주요 공약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게 바로 핀테크, 그 중에서도 인터넷전문은행이다.
정부의 이번 발표는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을 위해 실제적인 첫 삽을 뜬 것이다. 정부는 올해 초 이미 IT와 금융을 융합하여 창조금융을 활성화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한 바 있고 인터넷전문은행은 '오프라인 위주의 금융제도 개편'이라는 세부 과제 중 하나다.
시민들의 엄청난 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이 지급결제 관련 사업 등에 뛰어든 것도 아니다. 그저 정부가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덤으로 외국에서 현재 알리바바는 물론 애플 등 굴지의 기업들이 지급결제 시장에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전문은행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정부가 이야기하는 '창조금융' 속엔 엄청난 문제가 숨겨져 있다.
금융실명제 무력화와 금산분리 완화앞서 언급한 연초에 정부가 발표한 계획 속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창조금융을 활성화하기 위해 '규제 패러다임을 전환'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간 있던 규제를 완화해주겠다는 것이다.
그 중 제일 먼저 완화하겠다는 것이 바로 '금융실명제'이다. 차명거래 등을 방지하여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1993년에 도입한 제도인 금융실명제를 경제적 효과가 입증되지도 않은 비대면 계좌개설을 위해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고 직원이 영상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차명계좌와 명의도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4월 16일 한국금융연구원이 주최하고 정부가 후원한 세미나에서 나온 해외사례를 들어보자. 참고로 한국금융연구원은 현재 금융위가 주관하고 있는 인터넷전문은행 TF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국 인터넷전문은행에서는 실명확인을 위해 이체계좌 또는 개인수표를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자택 우편을 통해 주소 및 자필서명 등 3단계 인증절차를 거친다. 세미나에서 발제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렇게 실명확인하는 데 드는 시간이 2주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현실을 생각해보자. 물론 은행 창구에 찾아가고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계좌를 개설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지역을 옮겨가면서 계좌를 개설하지 않는 한 하루 이상이 소요되지 않는다.
해외의 비대면 본인 확인 방식이 국내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 금융소비자가 이렇게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실명확인 절차가 있는 인터넷전문은행을 사용할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위해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시사적 발언을 계속 하고 있다. 금산분리 원칙은 무엇보다 재벌그룹 총수일가의 사금고화를 방지하고, 금융의 건전성 확보, 경제력 집중 폐해 등을 막기 위한 중요한 제도다. 그럼에도 정부는 '도입 목적'과 '도입에 따른 사회·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일방적으로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일방적인 인터넷전문은행 도입, 득일까 실일까?정부의 움직임에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연일 비판 입장을 내놓고 있다. 성명 등을 통해 정부가 금융실명제 무력화와 각종 경제범죄 유발 우려가 큰 비대면 실명 인증 허용을 즉각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에 따른 ▲ 사회적·경제적 효과와 금융사고 예방책 ▲ 금산분리 원칙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국민들에게 밝히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책을 펼쳐나가길 요구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넷뱅킹이 매우 발달해 있어, 현재도 소비자들이 불편을 크게 겪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서비스 불편보다는 정부의 관리·감독 부실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보안문제 등에 따른 금융사고로 인한 피해가 더 우려되는 실정이다.
정책을 기획하고 펼쳐나가는 것은 시민들의 편익을 위함이어야 한다.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하지만 지금 정부의 인터넷전문은행 도입 움직임은 이러한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사실에 다소 어긋난 듯하다.
섣부른 규제완화와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을 통해 피해를 보는 건 시민들이다. 한 가지 불필요한 시나리오를 써보자.
인터넷전문은행이 우리나라에서 생겼다. 그리고 금융거래 시 사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그 피해를 물을 사람이 없다. 비대면을 이용해 차명계좌로 이루어진 거래였기 때문이다. 은행에 도덕적 책임 등을 물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금산분리가 완화되면서 굴지의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은행이다. 이미 유수의 로펌 변호사들이 버티고 있다. 결국 한 시민만 피해를 봤다.
이런 시나리오가 기우이길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지호 기자는 경실련 간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