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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발리 예술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붓(Ubud)에서 이름 있는 미술관 한 곳을 꼭 가보기로 했다. 우붓의 왕궁인 뿌리 사렌 아궁(Puri Saren Agung)으로 가는 길에 자세히 보니 잘란라야 우붓(JL. Raya Ubud) 거리의 북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미술관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가보고 싶은 미술관이 몇 곳 있었지만 우리는 우붓 왕궁을 본 후에 우붓 왕궁에서 가까운 이 미술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우붓왕궁에서 가까운 이 미술관은 우붓의 3대 미술관 중의 한 곳이다.
▲ 뿌리 루키산 미술관 우붓왕궁에서 가까운 이 미술관은 우붓의 3대 미술관 중의 한 곳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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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택한 곳은 뿌리 루키산(Puri Lukisan)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에 입구는 경사가 있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입구 왼쪽의 다리 같이 생긴 좁은 길을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올랐다. 미술관 입구가 계단식인데 며칠 전에 보았던 우붓의 계단식 논을 많이 닮아 있다. 사람 얼굴 크기만 한 열대 나무의 잎사귀들도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 미술관은 마치 우붓 중심가의 열대정원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듯했다.

우붓의 왕은 서양의 미술가들과 함께 뿌리 루키산 미술관 설립에 힘을 보탰다.
▲ 우붓의 왕 우붓의 왕은 서양의 미술가들과 함께 뿌리 루키산 미술관 설립에 힘을 보탰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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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루키산 미술관은 발리 섬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으로서 1956년에 설립되었다. 네덜란드 화가 루돌프 보네(Rudolf Bonnet)와 독일인 화가 월터 스피스(Walter Spies), 그리고 옛 우붓의 왕이 함께 설립했다는 이 미술관은 현재에도 우붓의 왕족에 의해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4관까지 있는데 발리 미술의 발전단계별로 미술관이 구분되어 있었다.

미술관 안에는 4개나 되는 큰 전시관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 입구에서 만난 첫 번째 전시관에는 이 미술관 설립자들의 이력이 그들이 남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설립에 나섰던 루돌프 보네와 독일인 화가 월터 스피스는 발리의 매력에 흠뻑 젖었던 미술가들이었다. 이들의 작품도 미술관 내에 잘 남아서 발리 현대회화의 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전시관에서부터 우붓 회화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발리의 화풍을 이끌었던 유럽 작가들 외에도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제자들의 작품이 다수 전시돼 있었다. 그래서 전시관 안의 그림들에는 서양화의 회화 기법 속에 발리인들의 종교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양식은 서양식이지만 신비하고 밝은 분위기의 우붓 양식 그림들이 가득 전시돼 있다. 양탄자를 짜 놓은 듯한 세밀한 묘사의 그림에서 묘한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우붓 양식 그림 속에는 야자수 아래의 농사 등과 같은 우붓의 삶이 담겼다.
▲ 우붓양식 회화 우붓 양식 그림 속에는 야자수 아래의 농사 등과 같은 우붓의 삶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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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발리에서 그려진 회화들인데 유럽 작가들과 그 제자들의 기부 받은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이 위에 먹과 붓을 이용하여 그려진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이제 '우붓 양식'으로 불린다.

우붓 양식의 그림들은 내용면에서 발리인들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발리인들은 작렬하는 발리의 태양 아래에서 논에 모를 심고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있다. 태양에 검게 그을린 그들의 구릿빛 피부가 그림 속에서도 건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에는 발리 주민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붓의 유명한 석조제품 장인들이 그림 속에도 담겼다.
▲ 우붓양식 그림 우붓의 유명한 석조제품 장인들이 그림 속에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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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들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체득한 우붓의 화가들은 우붓 양식의 그림들에 우붓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았다. 우붓의 거리를 지나다보면 힌두교의 수많은 신들의 석상조각을 만드는 가게들을 볼 수 있는데, 미술관의 그림 속에도 신상을 조각하는 우붓 조각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림 속에서 발리인들은 발리의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과일을 따거나 목욕을 하고 춤도 춘다. 발리 회화의 중요한 양식이 된 발리 양식의 그림들 속에는 발리의 일상적인 풍경들이 정겹게 담겨 있다.

어두운 무대를 배경으로 힌두교 신화들이 가득 녹아 있다.
▲ 바뚜안 양식의 그림 어두운 무대를 배경으로 힌두교 신화들이 가득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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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힌두교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그림들은 우붓 양식의 밝은 그림들에 비해 그림의 톤이 어둡다. 마치 어두운 연극무대 앞으로 연극배우들이 등장하여 신화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우붓 남쪽에 있는 바뚜안(Batuan) 마을에서 그려진 새로운 스타일의 이 그림들은 바뚜안 양식의 그림으로 불린다.

힌두교 신화는 발리인들의 삶에서 떠날 수 없는 소재이다.
▲ 힌두교 신화 힌두교 신화는 발리인들의 삶에서 떠날 수 없는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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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화창한 발리에서 왜 이렇게 어두운 그림들이 발전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흑백으로만 그려진 그림들이 생생하면서도 낯설다. 이 양식의 그림들은 발리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힌두교의 신화와 주술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화면 가득한 검은색의 어두움 속에 발리인들은 사원에서의 의례 등을 통하여 자신들만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어두운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 농염한 표현도 힌두교의 세상을 그림 속에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들만 보면 마치 힌두교 박물관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미술관 내의 그림 옆에는 영어 설명이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 뿌리 박물관 관람 미술관 내의 그림 옆에는 영어 설명이 있어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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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관이 친절하게 느껴진 이유는 회화와 조각 작품 옆에 대부분 영어로 작품설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작품 제목만 보아도 무엇을 그리려고 한 그림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가 있다. 특히 힌두교 신화와 관련된 그림은 설명을 보지 않고는 어떤 내용의 그림인지 알 수가 없는데, 작품 설명들이 참 도움이 된다.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발리여서인지 관광객들에 대한 서비스는 잘 되어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그림의 설명들을 보면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그려지고 조각된 작품들이다. 특히 발리 양식의 고전미술 시기로 불리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그려진 그림들이 많다. 새롭게 정립된 발리 전통미술의 이 작품들은 아직 100년이 안 된 것들이다. 발리의 문화 속에서 발리의 전통을 이어받고 서양 회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들은 발리의 전통을 재창조한 작품들인 것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의 건축물이 발리의 날씨와도 잘 어울린다.
▲ 뿌리 미술관 전시관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의 건축물이 발리의 날씨와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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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밖으로 나와 보니 시원스런 야자수 너머로 발리의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고 햇살은 아주 따갑다. 하지만 전시관을 둘러싼 전경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미술관의 전시관 3곳이 정원과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발리의 자연 속으로 들어온 듯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못의 석상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한가하기만 하다.
▲ 뿌리 미술관 정원 연못의 석상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한가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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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리의 전통 건축물과 잘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정원을 함께 둘러보았다. 야자수가 둘러싼 연못 안에 수련이 자라고 석상의 몸에서 연못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늑하기만 하다. 우붓 특유의 고요함에서 느껴지는 단상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다. 관람객들도 많지 않아 한가롭게 사색을 즐길 만한 곳이다. 나와 아내는 뙤약볕을 피해가며 조용히 미술관의 정원을 산책했다.

정원을 걷다가 나와 아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탐욕스럽게 땅과 하늘로 마구 팔을 뻗은 반얀트리(Banyan tree)가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칭칭 감겨 있는 것은 바로 돌로 만들어진 여인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 석상에는 '발리의 여인'이라는 작품 이름도 명기되어 있다. 석상을 나무가 붙들어 매어 버린 듯한 상황은 어느 정도 작가가 의도한 것 같기는 한데, 이제는 석상이 어디 도망을 갈 수도 없을 정도로 꼭 붙잡혀 있다. 마치 열대 반얀트리 나무의 기괴할 정도의 번성함에 발리의 여인이 도망가지 못하고 잡혀 있는 것 같다.

발리의 여인을 탐욕스러운 반얀트리 나무가 감싸고 있다.
▲ 발리의 여인 발리의 여인을 탐욕스러운 반얀트리 나무가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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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붓에는 가는 곳마다 예술의 숨결이 가득 스며들어 있다. 나는 이 여인상을 둘러싼 반얀트리의 여러 갈래 줄기가 우붓을 나타내는 예술성의 집약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 아내는 이 여인상이 발리의 자연에 경외감을 느끼는 발리인들의 생각이 녹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뿌리 루키산 미술관을 나서면서 미술관 정원이 열대의 날씨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가리는 나무에는 진달래의 분홍빛을 닮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고 그 옆의 반얀트리는 괴기스럽게 가지들을 벌리고 있었다. 날씨는 찌는 듯이 무더웠지만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파랬고,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00 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우붓, #뿌리 미술관, #뿌리 루키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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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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