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2인자가 어울린다' 얼마 전까지 늘상 가지고 있던 스스로의 신념중 하나였다. 냉정하게 나를 돌아봤을 때 난 모두를 통솔하는 리더감은 아니고, 차분하게 대장을 보좌해주는 역할이 딱인듯 보였다. 누구나 대장을 원하는 현실 속에서 나름 내 자신을 아는 지혜로운 성찰이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겸손함은 덤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어쩌면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은 영화나 소설과는 다르다. 친구나 지인들 사이에서는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 서로 자기가 리더가 되려는 경우가 많지만 진짜 사회생활에서는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왜? 나 안해! 리더나 대장이 되려는 사람은 생각보다 없었다. 아니 정말 드물었다. 거창하게 큰 단체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소모임에서도 서로 안한다고 빼기 일쑤였다. 왜냐?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이다. 나하나 감당하기도 힘든 세상살이인데. 잘못하면 대표로 욕이란 욕은 다 먹는데. 무엇인가에 생각은 있지만 간판 격으로 총알받이는 되기 싫은 것이다.
적당한 완장만 차도 나름 어깨를 으쓱거리고 지휘활동을 할 수 있는데 왜 가장 높은 곳에서 주목을 받는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요즘 사회에서는 잘못 나서면 나만 손해인 것이다. 적어도 남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으면 리더나 대장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제야 모임 등에서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먼저 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명예욕 때문에 조그만 감투라도 원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뭐든지 중심이 바로서야 제대로 굴러가는 법. 그런 이들이 대장이나 리더로 있게 되면 그 단체는 오래가기 힘들 것이다.
1인자 못지않게 중요한 2인자의 자세1인자 못지않게 2인자가 중요하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착각을 하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절실히 느꼈다. 착각 대장(이때만 대장이다)인 나는 일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난 딱 참모스타일이다. 대장감은 아니야"라는 말을 종종 내뱉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찌 보면 지극히 겸손하면서도 지혜로워 보이는 발언이지만 사실은 매우 거만하고 이기적이었다 할 수 있다.
참모가 누구인가? 대장을 빼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중 하나다. 대장의 일거수일투족에 간섭할 수 있으며 대장을 제외한 누구에게라도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큰일이 터졌을 때는 적당히 대장에게 최종적인 책임을 떠넘기기 딱 좋다. 어쩌면 나는 욕심은 많은데 거기에 책임을 질 용기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똑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난 1인자가 될 생각은 애당초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받쳐주는 일은 자신 있어", "허헛… 나같은게 무슨, 그냥 나는 조용히 옆에서 보좌만 할 그릇이야" 마치 또 다른 나를 앉혀놓고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같은 과가 같은 과를 안다고 많은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내속을 잠시 떨어져서 제3자의 입장으로 쳐다보는 느낌까지 받았다. 더불어 2인자라는게, 참모라는게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사실 2인자는 1인자 못지않게 어렵다.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는지라 인정받는 리더가 있으면 거기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참모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유비와 제갈공명, 이성계와 정도전,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 얼핏 생각해도 실과 바늘처럼 엮이는 관계가 참 많이 나온다. 비단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사장과 직원 등 세상 모든 관계는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싶다. 2인자가 받쳐주지 않으면 1인자 역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2인자가 따르지 않는 리더는 1인자가 아니다. 이른바 독고다이일 뿐이다.
참모의 역할은 말 그대로 리더가 마음 놓고 뜻을 펼칠 수 있게 해주며 항상 그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한다. 내가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 본의 아니게 나 역시 또 다른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적게 받는 참모가 좋은 2인자라고 생각한다.
총각은 생각해봤다. 나 역시 바르고 정의로운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나보다 더 그릇이 크고 더 반듯한 지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해야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일단 내가 그를 따르고 스스로 2인자를 자청하는 이유는 나와 뜻이 같기 때문이다. 리더와 다른 신념으로 그를 보좌할 수는 없다. 뜻이 다른 상태에서 큰 상대를 만나게 되면 적이 되거나 혹은 따르게 되더라도 나의 행동은 아부밖에 될 수 없다.
일단 그와 동조해 참모가 되었다면 나의 모든 시선은 리더에게 맞춰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도 뜻이 있지만 리더는 책임을 지는 자리인지라 참모의 이상은 그가 펼쳐 줄 수 있다. 참모는 앞장서서 리더와 함께 뜻을 부르짖을게 아니라 그가 냉철하고 위엄있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살림꾼이 되어야 맞다.
많은 삶을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총각도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은 이제 안다. 경쟁의 사회에서 뜻만 가지고 모든 것을 펼칠 수는 없다. 내 뜻이 있다면 남의 뜻도 있고 그렇게 대립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경쟁은 일어나게 되고 이기는 쪽이 뜻을 펼치기 쉽다.
참모는 진흙탕 싸움도 감수해야 한다. 리더는 위엄이 있어야 한다. 내가 그의 큰 그릇과 인격을 존경해서 참모가 되었다면 그것이 부서지지 않게 지켜줄 필요가 있다. 설사 오물이 튄다해도 그것을 내가 맞아가며 리더의 옷을 버리지 않게 하는게 제대로 된 참모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 리더가 깜빡 놓치는게 있다면 그것까지도 봐주는 것은 필수다.
어쩌면 참모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부모 역할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해본다. 늘 쳐다봐주고 그 사람이 잘되게 지혜를 발휘하고 더불어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추지 않고 그에게만 집중된다해도 질투보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어쩌면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 역시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지켜준게 아닐까싶다.
물론 1인자 역시 모든 시선을 받아내며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인지라 어떤 자리보다도 어렵다. 하지만 그런 1인자를 만들어내야하는 2인자 역시 어지간한 마음가짐과 또 다른 큰 책임의식이 없다면 어렵다는게 절실히 느껴진다. 2인자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고 대장이 되고 싶은 욕심을 피하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과연 나는 1인자가 어울리는 사람인가, 아님 2인자가 어울리는 사람인가? 뒤늦게 세상을 알아가는 엉뚱한 노총각은 가끔 이렇게 스스로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