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내느니 원리금을 갚는 게 낫지 않을까?"아내는 매달 내는 월세 30만 원이 아까운 듯하다. 생각해보면 정년퇴직까지 5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다 집 한 칸 없이 평생 월세만 전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아내는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자며 성화다.
강 건너 마을에 15층짜리 아파트가 들어섰다. 입주자 모집 광고가 붙었다. 아내는 모델하우스에 다녀온 모양이다. 24평형 7층, 1억5118만 원. 발코니 확장비용 432만 원, 입구 베란다 샤시 110만 원, 붙박이장 375만 원, 이사비용 100만 원, 도합 1억600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다.
대충 금액이 산출되자 아내는 말을 잃었다. 이쯤 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공제회비 깨면 4천만 원은 될 것 같아."공제회비는 공무원이 되고부터 지난달까지 28년간 매달 부었다. 별도의 저축이 없으니 그나마 믿어왔던 보장성 '방패막'이었다. 거기에 월세 보증금 2천만 원을 보태면 1억 원만 대출 받으면 된다.
원리금은 20년 상환으로 하자.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변동이율이지만, 3%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추후 점차 줄어들겠지만, 매달 원금 41만7000원에 이자 25만원 합쳐 66만7000원을 납부해야 한다.
"부담되지 않을까?"라는 내 말에 아내는 "매달 붓던 공제회비 30만 원과 월세는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되니, 그게 그거 아니냐"는 거다. 덧붙여 "원리금 상환은 내 집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보람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문제는 5년 후다. 퇴직연금 200여만 원. 국회에서 공무원 연금 안이 확정되면 이 금액도 장담하기 어렵다. "뭐 공공근로나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면 되지"라고 말했지만,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현실이란 생각이 든다.
퇴직할 즈음이 두 아이들 모두 대학을 마칠 시기여서 다행이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학비, 생활비 지출은 없을 테니 말이다.
말단 공무원 보수, 굶지 않고 살 수준이었다
"남들 돈 모을 때 대체 우린 뭐했지?" 아내의 자책에 지난 세월을 뒤돌아 봤다. 29살 때 공직에 들어섰다. 본봉 19만8500원. 월세와 밥값 제하고 웬만한 독종 아니면 저축은 건 불가능했다. 당시 말단 공무원 보수는 굶지 않을 정도였다는 표현이 옳다. 매년 물가 오름에 비례 소폭으로 인상됐다.
34살 때 아내와 결혼했다. 당시 남자 직업으로 공무원은 결혼 적령기 여성들에게 비인기 직종이었다. 맞벌이가 아니라면 고생은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400만 원짜리 전세를 얻었다. 밖이 훤히 보이는 벽채. 한 살 배기 첫 아이는 감기에 자주 걸렸다. 2년 후 빚을 내 14평짜리 아파트를 전세 2000만 원에 얻기로 했다.
문제가 생겼다. 집주인이 전세금 400만 원을 내주지 않았다. '세입자에게 받으면 되지 주인에게 달라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집을 보러 온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그들은 돌아간 후 다시 연락하는 경우는 없었다. 발로 툭 치면 우수수 무너질 것 같은 흙벽이 문제였다. 아무리 하소연해 봐야 주인은 묵묵부답.
별수 없이 벽면에 합판을 대고 비닐로 위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좀 깐깐하게 생긴 사람과 계약했다. 몇 달 후 가서 본 집 벽은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물러 터져서 주인이 배짱을 부렸던 것 같다"고 아내는 말했다.
널찍한 아파트를 위해 무주택자를 자처했다
지은 지 10년 가까이 된 아파트는 방바닥 보일러 호스가 터지는 일이 잦았다. 연탄용 보일러를 기름보일러로 바꾼 것이 문제였다. 연탄가스에 삭아버린 호스는 맥을 추지 못했다. 아래층에서 물이 샌다는 연락을 받으면 방바닥부터 뜯었다. 우리 집 천정에 물이새면 윗집도 온전치 못했다.
잦은 공사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집 주인은 전세 보증금에 300만 원을 보태 살 것을 제의했다. 좋게 말해서 제의지 '사지 않으면 전세를 올리겠다'는 압박에 가까웠다.
그렇게 10년 정도 살 즈음, 장인 어르신께서 이사를 오셨다. 반평생을 탄광촌에서 일 하신 분이다.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은 수많은 광부들의 터전을 앗아갔다. 석탄 분진 때문에 얻은 진폐. 의사는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것이 최고'라는 진단을 내렸다. 큰 딸이 살고 있는 화천을 찾으신 이유다.
14평짜리 아파트에 장인과 함께 산다는 것, 어르신께서 더 불편해 하셨다. 가까운 곳에 월세를 얻어 드렸다. 진폐에 대한 보상을 받으시기에 가능했다. 그 무렵 화천군청에서 공무원 임대주택을 공고했다. 24평형 아파트. 무주택자 1순위, 외지 전입자 2순위. 지역에 살면서 본인 명의 집이 있는 사람은 자격미달이다.
"이 아파트를 아빠 소유로 돌리고, 이사 가면 되지 않을까?"아내는 나보다 현실에 더 밝다. 월세로 전전하시는 장인을 위해 (우리가 살던)아파트를 드리는 것이 '아빠 불편함도 해소되고, 우리는 널찍한(?) 아파트에서 살 수 있으니 좋지 않으냐'는 논리다. 번거로운 게 싫다는 장인을 설득해 취득세와 등록세를 대납했다.
무주택자. 그렇게 홀가분할 줄 몰랐다. 이듬해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 확 트인 넓은 공간보다 중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방이 생겼다고 환하게 웃는 표정이 좋았다. 임대 아파트라지만 완전 무료는 아니다. 매달 20여만 원의 월세와 관리비, 전기, 수도 사용료 모두 합해 40여만 원 정도의 지출은 불가피했다.
그 행운도 길지 않았다. 임대 아파트에 대한 공무원들의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연기 기회는 주어지지만, 두 번은 어렵다.
'명의는 어르신 앞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 집입니다. 장인께서 나가셔야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7년 만에 읍내에 다시 월세를 얻었다. 23평형 2층 주택. 1층은 주인집, 2층이 우리 집이다. 딱 봐도 여름엔 무지 덥고 겨울엔 엄청 추울 구조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년 기간으로 임차인 란에 도장을 꾹 찍었다.
공무원 연금, 많은 걸까?"박봉이지만, 노후가 보장되니 사는 거지..."1989년, 급여 명세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선배직원은 그렇게 말했다. 20년 지난 후 퇴직연금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했다. 나를 위한 말이라기보다 선배 스스로 믿는 확신 같았다.
"70~80년대 그 어렵던 시기, 지금의 성장을 이루어 놓은 사람들이 공무원들이다."선배는 '당장 저축할 형편은 되지 못하더라도 노후는 보장 된다'고 말했다. 경제가 성장하면 연금도 더 나아질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대해 아무도 '설마'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25년이 지났다. 현실은 어떤가. 공무원 연금이 정치적 쟁점이다. 이대로라면 경제가 파탄 날지 모른다는 위기론도 들먹인다. 공무원 노조 측 주장과 정부입장은 팽팽하다. 국민들은 식상한 지 오래다. 이에 대해 누가 옳고 그름에 대한 주장은 하지 않겠다. 분명한 건 28년 퇴직연금 200여만 원도 보장된 금액이 아니라는 거다.
"뭐라고 말하지?"당장 가장 큰 문제는 그거다. 집주인에게 '우리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보증금을 돌려 주셔야 되겠습니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내일쯤 정중하게 '저희가 착실한 세입자 골라 (그 분들에게 보증금 받아)이사 나갈까 합니다' 라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내심 아내가 말해주길 기대했지만, 그런 건 남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