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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은 제5회 '의병의 날'이었다. 이날은 홍의장군으로 더 잘 알려진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날이기도 하다. 2010년 5월 당시 정부는 홍의장군이 의병을 일으켰던 1592년 4월 22일(양력 6월 1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 공포하였다. 

이날 오전 11시 군산에서도 의병 관련 행사가 열렸다. 군산시 옥구읍에 있는 옥구초등학교 강당에서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충혼제가 군산문화원 주최로 개최된 것. 이날 충혼제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1부 식전행사, 2부 제례, 3부 충혼식 순으로 진행됐다.  

 인사말 하는 이진원 군산문화원장
인사말 하는 이진원 군산문화원장 ⓒ 조종안

이진원 군산문화원장은 인사말에서 "돈헌 임병찬(1851~1916) 선생은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광월마을) 출신으로 집권층의 부패와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1906년 오직 호국 정신만으로 분연히 일어서 항일 구국투쟁을 하시다가 1916년 거문도 유배지에서 자결하신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임병찬 선생은 16세 때 전주 지방시에서 수석 합격을 했지만, 생계가 어려워 사역(使役)에 종사했으며 1888년에는 호남에 대 흉년이 들자 가세가 빈궁한 중에도 전 재산을 털어 긍휼에 나서기도 했던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다"고 부연했다.

이 원장은 "임병찬 선생이 구국의 일념으로 자결하신 지 100년이 지난 지금, 그 위대한 정신이 계승 발전되기는커녕, 돈헌 선생이 군산 출신이라는 것조차도 모르는 시민이 많다는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라며 "처절했던 장군의 의병활동 정신을 가슴에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도록 다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김개남 굴레 벗기고 본모습 바로 봐야

1962년 임병찬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또 그의 동생 임병대(1996년 건국포장), 아들 임응철(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손자 임수명(1992년 건국포장) 모두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大同團)에 가입, 활동하는 등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유공자 집안이기도 하다.

김종수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돈헌 임병찬의 생애와 복벽운동>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임병찬에게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밀고하여 죽게 한 오점이 남아 있는데, 그의 삶 전체로 볼 때 그가 대마도와 거문도에 유배를 두 번이나 당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쏟은 공은 그 오점을 충분히 덮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잡초가 우거진 임병찬 생가터와 표지석
잡초가 우거진 임병찬 생가터와 표지석 ⓒ 조종안

임병찬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신분 문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향리' 가문 출신이라는 것. 그러나 그는 고종황제에 충성하면서 군수와 의병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른다. 그렇다고 그가 지위에 연연하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벼슬과 포상을 몇 차례씩 사양하고 문란한 정국을 걱정하다 의병을 일으킨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제라도 김개남의 굴레를 벗기고 본모습을 바로 봐야 한다"라며 민간 차원의 예우 문제도 지적했다. 김개남 장군은 가묘가 조성되고, 추모비가 곳곳에 세워졌으며,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으나 임병찬은 무덤과 비석이 분리되어 방치되어 있고, 사당 하나 없는 실정이라는 것. 김 교수 말대로 임병찬 선생 고향마을에는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이다. 아래는 이진원 원장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첫 번째 취재 대상은 이인식 선생과 임병찬 의병장

- 군산문화원과 언제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교직에 있을 때는 군산문화원에 대의원이나 이사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정년퇴직을 얼마 남겨놓은 2000년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안을 잘 아는 이창열 교장, 김양규 교장 등이 나를 이사로 올려놓고 이런저런(한자 쓰기, 영어 강사 등) 일을 시키는데 모르는 척 할 수도 없고, 따분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니 일에 애정도 생기고 시민과 선후배들 도움으로 원장까지 하게 됐다. '상선약수' 정신을 가슴에 담고 한다고 하는데, 여러모로 부족함을 느낀다."

이진원 원장은 2000년 군산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 했다. 그 후 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노인들에게 영어와 한자 쓰기, 컴퓨터 교육을, 초등학생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어느 날 사회봉사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2006년 '실버넷뉴스'(인터넷뉴스) 기자가 되어 2013년 8월 문화원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노인 건강·복지 중심의 기사를 썼다.

 이인식 선생 동상(왼쪽)과 임병찬 선생 동상(오른쪽)
이인식 선생 동상(왼쪽)과 임병찬 선생 동상(오른쪽) ⓒ 조종안

- 인터넷신문 기자 경력이 있다. 예전 생활로 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취재하고 싶은 상대는 누구인지?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과 돈헌 임병찬 의병장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 취재하고 싶다. 이인식 선생은 임피면 출신으로 3·1독립만세운동 때 선봉에 섰다가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물려받은 논밭을 팔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거금을 헌납하고, 일본에서 한국인 학생 항일결사대 일원으로 거사를 도모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임병찬 선생은 39세에 낙안 군수 겸 순천 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며 농정에 공을 세웠다. 당시 고을 주민들이 사례했으나 거절하였고, 비를 세우는 것조차 만류하였다. 1906년 전북 최초로 항일 구국투쟁(병오창의)을 거병하였고, 국권침탈 이후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독립의군부를 조직, 총사령으로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1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거문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916년 5월 순절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두 분 동상이 월명공원과 근대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족들과 관심 있는 분들이 가끔 찾아뵙는 모양인데, 시민들의 관심이 없어 지쳐있는 상태다. 범시민적 차원의 문화행사도 개최하고, 전북 순창 회문산에 잠들어 있는 임병찬 장군 유골을 고향 선산으로 모셨으면 한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도리라고 생각해서다."

- 2015년 상반기에는 중동 당산제, 정월 대보름 풍물한마당, 시민 문화교실, 최호 장군 제416주기 추모제, 향토문화역사 탐방 등을 주최했다. 하반기 계획은?
"하반기 사업 계획은 시민과 함께 떠나는 문화기행, 오성 문화제전, 옥구 농민 항일항쟁 기념행사, <군산 문화>를 발간 등이다. 남은 임기 동안 군산의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며,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진원 문화원장#의병장 임병찬#애국지사 이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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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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