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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보고 뽕만 따는 일석이조가 아닙니다. 비단까지도 챙기는 일석삼조입니다. 한 권 책으로 세 가지를 읽을 수 있는 삼합입니다. 저자의 삶에서 우려 낸 '개인사', 옛 그림 48편에 담긴 '그림 이야기', 팔만대장경에서 간추려 담은 '불법' 이렇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한 숟가락으로 맛보는 삼합처럼 곁들일 수 있는 책입니다.

세 가지 이야기 궁합이 여간 잘 맞는 게 아닙니다. 마치 옛 그림 48첩으로 차린 48첩 반상 같습니다. 서로 묘한 조화를 이루며 식감과 풍미를 더해주니 산해진미 같은 내용에 진수성찬 같은 설명입니다. 

삼합으로 읽는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지은이 조정육 / 펴낸곳 아트북스 / 2015년 5월 22일 / 값 2만 2000원)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지은이 조정육 / 펴낸곳 아트북스 / 2015년 5월 22일 / 값 2만 2000원) ⓒ 아트북스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지은이 조정육, 펴낸곳 아트북스)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맞춰 기획 된 '옛 그림으로 배우는 불교 이야기' 시리즈 중 두 번째인 법(法) 편입니다. 48편이 넘는 그림을 멍석처럼 펼치고, 팔만 대장경에서 가린 경구와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 저자가 꾸려가고 있는 삶에서 간추려낸 이야기들을 이야기 삼합으로 꾸려 엮고 있습니다.

48편 그림이 차례(한 차례에 두서너 장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음)를 이루고, 차례 한 편을 열 때마다 한 구절 경구를 애피타이저를 챙기듯 읽게 됩니다. 팔만사천 법을 한 구절로 새길 수 있는 불교 경전의 백미들입니다.

건강한 몸, 정원이 딸린 집, 평생 나오는 연금, 그리고 통장에 꼽아둔 현금 10억… 이 정도면 행복하겠지?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행복한 노년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오랜 설왕설래가 끝난 뒤 한 친구가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 바로 위 문장이었다.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165쪽

친구들과 다듬이질을 하듯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영락 없는 아줌마들 수다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는 마음은 효심이 가물거리는 그리움입니다. 장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아들 이야기, 자전거를 시속 60km쯤으로 달릴 수 있다는 남편 이야기는 은근한 자랑입니다.

사람을 보면 첫눈에 그 사람 전체를 읽을 수 있다는 고백(?)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호기심이자 심안을 떠올리게 하는 오묘한 유혹입니다. 삼합 같은 책을 읽은 탓인지 중년 여성들이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들고, 비 오는 날, 혹시 청바지 가게 앞을 지나 갈 일이 생기면 저자가 그려내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예전처럼 무심히 지나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조차 듭니다.  

화가들이 물레질을 하듯 붓질을 하고, 길쌈질을 하듯 채색해 가며 그려낸 그림, 선과 담묵과 구도 등으로 담아낸 사연들을 저자는 실타래를 풀듯 술술 풀어냅니다. 선으로 그려낸 윤곽, 담묵으로 담아낸 음영, 구도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배경으로 깃들어 있는 사연까지도 알록달록하게 풀어냅니다.

여기 그림은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심심풀이 삼아 스케치하듯 그린 그림이니 그저 집안 식구들끼리만 펼쳐 보거라.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린 그림이 아니니 명심해야 하느니라. '남에게 보이지 마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만약 집안 어른인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집 밖의 사람들에게 보이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엄포나 다름없다.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277쪽

조영석(1686∼1761)이 그린 <바느질>에, 그림 제목으로 달린 사제(麝臍)와 함께 그 곁에 달려있다는 글을 저자가 풀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조영석은 세조 어진을 옮겨 그리게 될 감조관(監造官)으로 천거되지만, 그림 그리는 일이 천기(賤技)로 치부되던 시절인 탓에, 이를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어진 제작에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 왕의 부름을 거역해 옥살이를 한 후 절필을 감행한 선비이자 유학자입니다. 

그런 조영석이 그림 제목(사제麝臍, 사향노루 배꼽)와 함께 그 곁에 달려있던 글을 그림을 보는듯한 사연으로 풀어내니 그림에 담긴 의미가 구구절절한 사연이 돼 또 다른 감상을 자아냅니다.

개꿈처럼 보이는 그림도 태몽처럼 풀어낼 것 같은 기대감

일수사견이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에겐 그냥 물인 물이, 물고기에게는 생활 공간이고, 아귀들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이고, 천인들에게는 영롱한 보석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오래 돼 그냥 값나가는 그림쯤으로 보일 그림들이 저자에게는 불법을 담고 있는 법기로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로 견준다면 저자의 눈은 옛 그림을 그리는 천수천안이고, 저자의 가슴은 팔만 대장경을 담고 있는 포대화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뚝배기처럼 감상할지도 모를 그림들을 책에서는 아주 오래 돼 깊은 맛이 우러나는 장맛처럼 가슴에 착착 감기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림에 불법 단청을 덧입히니 그림에서 우러나는 의미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입니다.

농부는 입으로 쟁기질하지 않는다. 목동이 꼴을 먹이는 행위도 입으로 하지 않는다. 자신이 배운 공부를 남에게 과시하는 행위는 입으로 쟁기질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는 행위도 입으로 꼴을 먹이는 것과 같다. 입으로 쟁기질할 수 없고 꼴을 먹일 수 없듯 자기가 배운 공부와 종교도 입으로 실천해서는 안 된다. 몸으로 해야 한다.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91쪽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책에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 김홍도, 신사임당, 장승업, 정선, 최북, 윤두서, 신윤복 같은 내로라하는 화가들은 물론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자 미상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 모두는 붓으로 그린 꿈이자 삶, 불법까지도 갈무리하고 또 다른 형태의 경전입니다.

개인사에서 사는 이야기를 읽고, 옛 그림을 통해 불법에 빠져들다 보니 시나브로 개꿈처럼 보이는 어떤 그림도 태몽처럼 풀어낼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되는 건, '옛 그림으로 배우는 불교이야기' 시리즈로 나올 세 번째 승(僧)이 벌써 기대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지은이 조정육 / 펴낸곳 아트북스 / 2015년 5월 22일 / 값 2만 2000원)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 - 초기 경전에서 대승경전까지, 옛 그림으로 만나는 부처

조정육 지음, 아트북스(2015)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조정육#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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