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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김기민(23)씨가 지난 1일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서 '라 바야데르'의 솔라르 전사 역으로 화려하게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ABT 수석 무용수 서희와 공연한 '라 바야데르'는 한인 무용수가 세계 정상의 발레단에서 최초로 남녀 주인공 역을 맡은 발레계의 사건이었다.

발레 영재로 출발, 초고속으로 정상에 오른 발레리노 김기민씨는 6일 오후 2시 서희씨와 다시 무대에 오른다. 리허설로 분주한 김기민씨를 지난 4일 오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만났다.

"테크닉은 옵션... 정서가 중요해"

발레리노 김기민이 ABT 봄 시즌 공연이 열리는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에서 포즈를 취했다.
▲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 발레리노 김기민이 ABT 봄 시즌 공연이 열리는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에서 포즈를 취했다.
ⓒ Sukie Park/NYCultureB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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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아 역이 서희씨로 대치됐다는 걸 언제 알았나요?
"지난달 16일 폴리나 세미오노바가 부상을 입었다는 걸 들었습니다. 함께 춰본 적이 없어서 기대를 했는데, 한편으로는 아쉬웠습니다. 폴리나가 세계적인 스타라는 걸 떠나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난다는 것은 설레고, 긴장하고, 기대하기 마련이지요. 지난달 19일 뉴욕에 도착한 날 서희 누나로 대치됐다는 소식을 들어 정말 기뻤습니다. 파트너가 한국 사람이라서기도 했고, 다른 나라 사람과는 달리 저희끼리만 통하는 눈빛이나 통하는 문화도 있으니깐요."

-한국 사람끼리 만나니 갑자기 서열이 생기지 않던가요? '누나', '동생'이라는.
"그렇죠. 제 장기일 수도 있는데, 선배들이랑 빨리 친해지는 편이에요. 제가 영재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3년을 뛰어 넘다 보니까 항상 사회 생활에서도 나이 또래가 아니라 최소한 3살 위였지요."

-그게 서양 발레와 한국 발레와 다른 점이기도 하겠어요. 서희씨를 만났을 때 실제로는 누나인데, 연인으로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저는 무대에서 공과 사를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선배라도, 혼나더라도, 연기할 때만큼은 그것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버릇없다'고 생각하시지요. 관객들이 2000명~4000명 오는데, 선배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서 3800명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너무 큰 손해가 아닌가요."

-한국인끼리는 나이가 관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던가요? 사실 외국에서는 존경어를 쓸 필요가 없으니 나이와 무관하게 서로 프로로 대우할 수 있을 텐데.
"한국 발레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어요. 그건 한국 발레가 풀어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면서, 못 풀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군대, 유교 사회라는 문화로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어린 사람이 주역을 하는데, 코르드발레와 무대 위에서 마임을 할 경우 상대가 선배다 보니깐 '살살'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왜 이게 큰 문제가 되는가 하면, 예를 들어 '라 바야데르'같은 경우는 계급 사회의 최상층과 최하층이 만날 때 아랫 사람은 위 사람의 눈조차 볼 수 없고, 위에서는 아랫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선배'라고 생각을 하면, 연기지만 거짓(fake)이 돼 버리는 거죠. 연기는 'fake'이지만, 진짜 'fake'가 돼버리기 때문에 관객이 연기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됩니다."

-서희씨와 리허설할 때 어땠나요?
"정말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가진 무용수인 것 같아요. 한국인이다 보니깐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불편해 하는지 누나한테 말하지 않아도, 벌써 알고 있지요. 어느 작품에서나 리허설에서 처음에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는 것이 무척 중요해요. 우린 연습도 일주일 밖에 못했는데, 서희 누나랑은 쉽게 호흡이 잘 맞았어요. 서희 누나는 파트너를 배려할 줄 알고, 무대에 임할 때 두려움이 없는 고마운 파트너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긴장도 안 되고 편하게 했습니다."

-'라 바야데르'가 고대 인도가 배경이니 아시안들이 배역을 맡아서 관객도 더 신빙성있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솔라르 이미지 소화해내는 데 플러스가 되겠지요."

-1일 첫 공연 때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3800석)가 마린스키(약 2000석)보다 극장이 커서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극장 크기, 관객 수 때문에 떨지는 않구요. 10명 앞에서도 떨리는 무대가 있지요. 제가 떨고 설렌 것은 처음 미국 관객과 전막 무대로 선보이는 자리라 긴장을 했던 것 같아요.

-1막에서 솔로로 제테 마니지(제테 파르테르 마니지) 후 객석에서 박수가 크게 쏟아졌죠.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아, 내가 ABT 데뷔 무대에 성공했다' 뭐 그런 느낌이라도 왔는지.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중간에 실수했다면, 박수가 안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넘어졌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니깐요. 제 철학이기도 한데요. 발레를 올림픽과 비교한다면, 올림픽은 점수를 매기지만 발레는 점수를 매기지 않습니다. 제가 넘어진다 해도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깎지는 않습니다. 넘어지더라도 공연이 다 끝났을 때 관객이 어떻게 느꼈는지가 제겐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발레 테크닉보다 정서적인 것, 연기가 더 중요한가요?
"제 연기에 테크닉이 옵션이지, 테크닉에 연기가 옵션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담이 없어서 테크닉이 잘 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많이 넘어지고, 많이 실수하는데, 그 순간이 아니라 공연 끝나고 평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이미지를 당신한테 줬느냐를 중시합니다. 관객도 그걸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마린스키 발레단의 특징인가요?
"마린스키의 특징이면서 다른 발레단과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마린스키는 연기, '역할의 이미지'를 중시하는 발레단입니다. 내가 아니라, 솔라르 전사나 지그프리드 왕자가 실제로 나오는 거지요. 그렇게 느껴져야 합니다. 공연 전에도 무대를 돌거나, 연습하는 게 하니라 가만히 앉아서 역할을 생각합니다. 무대에 나가기 전부터 캐릭터가 되어 있어야 해요. 이미 전사이자 왕이어야 무대에서 편하게 나옵니다. 그러지 않으면, 무대에서 몸에 힘이 들어가요. '나는 전사야!'하면서. 하지만, 전사들은, 진짜 왕들은 이미 왕이므로 보여줄 필요가 없는 거지요. 저는 이미 왕이어야 합니다. 그걸 더 많이 연구합니다."

-연기, 감정 이입이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가요?
"저는 발레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할 소화했다는 말이 제일 듣기 좋아"

6월 1일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ABT의 '라 바야데르' 공연에서 김기민과 서희가 2인무를 추고 있다.
▲ ABT '라 바야데르'에서 김기민과 서희 6월 1일 링컨센터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ABT의 '라 바야데르' 공연에서 김기민과 서희가 2인무를 추고 있다.
ⓒ Gene Schiavone/A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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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김기민은 테크닉이 좋은 발레리노로 알려졌는데.
"한국에서 그렇게 많이 알려졌는데. 그건 아마도 연기를 그렇게 해서 점프도 잘 됐고, 점프를 편하게 해서 연기가 돋보인 것이 아닐까요. 만일 점프만 잘 했다면, 아마 평이 '쟤는 점프만 잘하는 애'라고 했겠지요. 사실, 더블 아상블레 마니지는 많은 남자 무용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테크닉인데, 저의 장기가 됐습니다. 원래 안무는 8번을 도는 것인데, 상당히 힘들고, 어렵지요. 그래서 어떤 무용수는 6번만 도는 경우도 있고, 반만 돌고, 다른 테크닉으로 바꾸기도 해요. 음악 맞추는 것 또한 힘든데, 지휘자님도 많이 도와주셔야 하지요. 저는 그게 다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평은?
"역할을 소화해 낸다는 말이요. 특히 제가 존경하는 전설의 무용수 마카로바가 '네가 춤추었을 때 그냥 테크닉만 하는 게 아니라, 한 제스처 제스처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셔서 기뻤습니다."

-마린스키와 볼쇼이의 라이벌 의식이 상당할 것 같다. 어떻게 다른가요?
"마린스키는 좀 더 전통을 중시하고, 팔이, 선이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볼쇼이는 자유롭고, 다이나믹하지요. 두 러시아 발레는 정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해요."

-ABT 체험은 어떤가요?
"ABT는 관객들 환호 소리가 무척 좋았어요. 박수도 신나게 쳐주고. 자유로운 것 같아요.관객도 무용수들도 무서움이 없고, 자유롭다는 점, 하고 싶으면 박수 치고, 소리 지르고, 춤 추고..."

-러시아 관객은 더 전문적일 것 같은데.
"웅장하지요. 다 같이 박수 치고, 무거운 편이에요. 소리 지르지 않고, 테크닉을 실수해도 역할을 어떻게 소화해내는지를 많이 봅니다."

-ABT 코르드발레에 한예종 출신(한성우,안주원) 단원들이 있는데.
"저와 친해요. 많이 반가워서 어제도 한인타운에서 밥먹고, 술도 조금 마셨어요. 공연 때문에 많이 못 마셨지만요. 뉴욕 한인타운은 정말 한국같아요!"

-ABT는 한인 무용수도 많고, 중국계, 일본계, 그리고 흑인 솔로이스트 미스티 코플랜드 등 민족적으로 다양하지만, 마린스키에서는 자신이 유일한 아시안이다. 마린스키에서 소외된 느낌은 없나요?
"ABT에서는 제가 소외된 느낌은 전혀 없지요. 러시아에서는 처음에 갔을 때는 약간 느꼈습니다. 이후엔 저와 친해지려고 하는 것 같아요. 워낙 혼자들, 개인 생활들을 해서 왕따 그런 느낌은 없어요. 약간 외롭기도 하지만, 지금은 외로워할 시간이 아니라 부담감을 느껴야 할 시간이지요."

-22세에 정상까지 올라갔는데... 부담감은? 
"300년 가까이 된 발레단에서 이례적으로 주역을 하고 있으니까요. 마카로바, 바리시니코프, 조지 발란신, 누레예프, 니진스키… 다 마린스키 출신인데요. 보통 26~27세에 주역을 맡게 됩니다. 수석 무용수가 됐을 때, 처음에는 정말 너무 놀랐고 부담스러워서 기쁘지도 않았어요. 처음에 외국에 갔을 때는 한국인으로서 발레를 알려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고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러시아에 대한 의무감도 있어서 부담감이 큽니다."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재능과 노력과 선생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머님의 좋은 결정, 아버지의 지원, 그리고 형도 있었지만요. 저는 앞만 보고 열심히 했습니다. 연습도, 공연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실수해도 열심히 했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본인에게 춤, 발레는 무엇인가요?
"발레는, 또 다른 언어입니다. 발레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인도말을 못해도 인도 사람들에게 제가 무엇을 하는지를 표현할 수 있지요. 그게 말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플러스로 몸의 언어로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스토리를 전달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동시킬 수도 있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발레 댄서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공연뿐 아니라 많은 것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책이든 영화든 많이 봐야 춤에서 몸으로 많이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겁니다. 이것도 언어인데, 우리가 영어 배울 때 얼마나 힘들어요? 가만히 있어도 기쁜지 아닌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예술인 것 같아요. 바이올리니스트, 성악가는 서 있는 것만 봐도 누가 프로페셔널인지 아닌지 보이잖아요? 그런 에너지가 필요하려면 많은 걸 알아야해요."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 기사는 <뉴욕컬처비트>에 전문이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기민, #마린스키, #ABT, #뉴욕컬처비트, #라 바야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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