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유럽 여행에서 맥주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된 후 여러 맥주를 맛보고 돌아다녔다. 최근 한국에도 불기 시작한 크래프트 맥주 열풍으로 이제 막 새로운 맥주에 눈을 뜬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되고자 하는 마음에 정리를 시작했다. 조금씩 축적한 개인 지식에 덧붙여 미국양조협회 등 사이트와 텍스트, 한국 비어포럼과 '맥만동' 등을 참고했다. - 기자말
에일vs.라거 (Ale vs Lager)'라거'에 익숙하던 우리에게, '에일'은 보기 드문 단어였다. 에일은 일부 펍(맥주 가게)이 들여오는 수입 생맥주에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맥주 펍이 '에일'을 외친다. 하이트진로의 퀸즈'에일', OB의 '에일'스톤 등 국내 맥주 기업들의 신제품 이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맥주는 크게 에일과 라거, 둘로 구분된다. 본래 가장 뚜렷한 기준은 맥주를 발효할 때 사용하는 효모와 그에 따른 발효 방식의 차이다. 에일에 쓰이는 효모는 발효 시 효모가 윗면에 둥둥 뜨며, 라거 효모는 발효가 되면서 바닥에 가라앉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에일은 '상면 발효 맥주', 라거는 '하면 발효 맥주'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맛과 향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향긋한 과일 내음과 진하고 깊은 맛이 에일의 특징이라면 라거는 과일 향이 적은 대신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 특징이다.
브루어리(Brewery)에일과 동시에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브루어리'라는 말도 마찬가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나름대로 긴 역사를 품고 있다. 간단한 사전적 의미라면 '맥주 양조장'인데, 이른바 비어벨트(beer belt)라 불리는 서유럽이나, 홈브루잉 즉, 작은 양조장이 발달한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반적으로 쓰여 왔다.
한국도 특히 재작년 이래, 서울을 필두로 부산, 광주, 수원, 대전, 제주 등지에서 'Brewery', 'Brewingcompany', 'Brew pub' 등의 간판을 내건 맥줏집을 볼 수 있다. 뭔가 색다른 것 같아 들여다보니, '수제 맥주'를 판단다.
크래프트 비어(Craftbeer) 같은 맥주를 두고 어떤 이는 수제 맥주라 하고, 어떤 이는 장인 맥주라 부르며, 또 다른 이는 소규모 양조장의 맥주라고 부른다.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이 모두를 '크래프트 비어'라는 하나의 원 안에 묶는다는 게 이상하다.
크래프트? 아주 낯설진 않다. 우선 21세기 초 게임계를 풍미했던 스타크래프트가 떠오르는가 하면, 학창 시절의 주입식 영어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이 단어를 '수제'라 이해하도록 했다. 그럼 크래프트 맥주 역시 수제 맥주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단순하게 끝내기엔 뭔가 찜찜하다. 크래프트 맥주, 정확히 어떤 맥주를 말하는 걸까?
우선 크래프트비어는 브루어리와 달리,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통 맥주 업계에서 오래 전부터 쓰던 개념은 아니다. 미국에서 마침내 금주령이 해제되며 소규모 양조자들의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때, 미국양조협회(American Brewers Association, 아래 ABA)에서 만들어낸 용어란다.
요즘 생겨나는 많은 펍이 상호 뒤에 크래프트비어라는 문구를 자그맣게 넣거나, 아예 상호 자체를 '크래프트 펍'등으로 만드는 점, 그리고 그 펍 대부분이 40평 안팎의 작은 규모를 가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크래프트비어를 소규모 양조장 맥주라 부르는 것도 틀린 것 같진 않다.
사실 '크래프트비어'는 해외에서도 그 개념이나 정의가 아직 통상적으로 완벽하게 확립되지는 않은 상태다. 그래도 미국의 BA(Brewers Association)가 만든 'American craft brewer'의 조건 3가지를 보면 크래프트 맥주에 대한 이해가 조금 쉬울뿐더러, 어깨너머로나마 크래프트 맥주의 철학까지 살짝 맛 볼 수 있다.
① 독립적(independent) : 경영상 '독립 자본'이 원칙이며 투자를 받더라도 외부 자본 비율은 25% 미만일 것. AB인베브와 같은 세계 굴지의 주류 회사들이 유수의 크래프트브루어리들을 인수 합병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실제로 그 중 일부가 이미 합병된 예가 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독립 자본의 원칙이 깨지므로, 그 브루어리에서 나오는 맥주는 더 이상 크래프트 맥주라고 부르기 힘들다.
② 소규모(small) : 연간 생산량이 6백만 배럴, 즉 약 7억 리터 이하일 것. 억대 리터라니 쉽게 감이 오지 않는데, 한국 OB맥주의 연간 생산량이 13억 리터(2012년 기준)라는 것을 참고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③ 전통적(traditional) :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력 맥주들 가운데 올몰트(100% 보리맥아로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맥주), 혹은 첨가물이 들어간 맥주(단, 맥주의 풍미를 떨어뜨리지 않고 더 좋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 첨가물을 사용했다는 것이 전제됨)의 비중이 최소 50%가 돼야 할 것.
즉, 쉽게 말해 대기업 공장들이 대량으로 찍어내는 라이트 라거와는 다른, 독창적이면서도 '정말 맥주다운 맥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옥수수나 쌀이 들어간 어드정트(adjunct) 라거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그 브루어리는 앞선 독립 자본과 소규모라는 조건을 만족한다 해도 크래프트 브루어리로 정의하긴 힘들다.
차이 (Different)
주위에서 맥주를 싫어하는 친구들을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맥주를 꿀꺽꿀꺽 잘 마시기야 하지만 아무래도 다들 밍밍하고 싱거운 게, '그 맥주가 그 맥주'다 보니 싫증이 났다는 전자와 맥주가 가진 과한 탄산이 부담스럽다는 후자.
사실 양쪽 다 맞는 소리다. 많이 마신다 해서 취하지도 않고, 많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맛도 없는 '보리 탄산수'는 가성비로 따질 때 소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데 아마 이들이 크래프트맥주를 마신다면, 적어도 '맥주가 다 똑같지 뭐', '탄산 때문에 목구멍 따가워서 못 마시겠다'는 말은 쏙 들어갈 수도 있다. 경험을 빌리자면, 아마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게 진짜 맥주야?"라고 되물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모든 맥주가 밝은 황금색은 아니다. 탄산이 거의 없는 맥주도 있고,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게 마시지 않는 맥주도 있다. 짜릿한 신맛이 혀를 자극하는 맥주도 있고, 달콤한 초콜릿 향이 코를 적시는 맥주도 있다. 절대 꿀꺽꿀꺽 마실 수 없는 맥주도 있고, 소주 못지 않게 높은 도수를 자랑하는 맥주도 있다. 이런 각양각색 스타일의 수십 수백 가지 맥주들이 언제부터 있었나 싶다. 맥주를 '선택'할 수 있다니.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만큼 크래프트맥주들은 확실히 '다르다'.
이 맥주, 알려주고 싶다 (Encounter)휴학계를 던지고 유럽 여행을 떠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때였다. 너무 많이 걷느라 지쳐서 시원한 맥주나 한 잔하며 쉴 요령으로 어느 골목 허름한 펍에 들어갔는데, 어째 생각보다 맥주 종류가 너무 많아 고르는 것부터 쉽지가 않았다.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사람 좋은 아저씨께 한 잔 추천받아 마신 그 날의 맥주 한 잔이,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내 주변의 소위 '맥덕(맥주덕후)' 대부분은 이처럼 우연한 마주침으로 새로운 맥주 세계에 입문했다. 여행, 유학, 사업 차 떠난 해외에서 접한 놀라운 맥주들.
이들을 등지고 다시 한국의 식어빠진 듯한 맛의 맥주들을 마셔야만 한다는 악몽 같은 사실은 처음엔 몇 안 되는 수입 맥주에 의존하게 만들더니, 조금 더 적극적인 '맥덕'들로 하여금 새로운 맥주들을 들여오는데 성공하게까지 했다. 사견이지만, 어쩌면 여기엔 분명 자기 혼자만 가만히 알고 즐기는 것보단 맛있는 맥주를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즐기고픈 우리네 정(情)도 한몫 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에 크래프트 맥주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도록 이끈 크래프트 맥주 수입 유통사인 브루마스터스 인터내셔널 역시 시작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사실 브루마스터스를 만든 두 명의 사장은 원래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사업가와 미국 로펌의 변호사인데, 자신들이 미국에서 맛있게 마신 맥주들을 한국에도 소개해주고 싶은 맘에 수입을 시작했다고.
금방 식은 열풍 (Failure)그런데, 사실 지금의 크래프트 맥주 열풍이 꼭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건 이전에 한 번 비슷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특히 2002년 월드컵 즈음 '독일식 정통 하우스 맥주와 수제 소시지'를 만든다는 브로이하우스(독일어로 맥주 양조장)들이 우후죽순 생겼던 때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강남의 오킴스브로이하우스를 필두로 전국에서 꽤 많은 '브로이하우스'가 손님을 맞았다. 2000년 초반 소규모 맥주 제조 면허가 풀리자 주로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이를 사업의 기회로 여겨 뛰어들었지만, 높은 주세는 하우스 맥주 사업을 계속하는 데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개업 직전에야 배운 얕은 맥주 양조 기술의 바닥이 금세 드러나 맥주의 품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이들이 몇 년 새 하나 둘 간판을 내리고 사라진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브로이하우스의 등장 배경에 담긴 한계를 볼 때, 이미 어느 정도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맥덕들의 노력(Geeks)무언가를 유별나게 깊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명 '덕후'라고 부른다. 오타쿠에서 유래된 이 말은 마니아와도 그 뜻이 통하며, 요즘엔 '별난 괴짜들'이란 뜻을 가진 '긱스'란 말로 대신하기도 한다. '맥덕' 역시 '비어 긱스(beer geeks)'라고 불린다. (<Officially missing U>로 인기를 모은 힙합 그룹 긱스나 맨유의 라이언 긱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 덴마크의 이름난 '괴짜' 크래프트브루어리 미켈러(Mikeller)의 스타우트 '비어 긱 브랙퍼스트(맥덕후의 아침 식사)'는 괜히 나온 이름이 아니다.
집에서 직접 맥주를? (Home-brewing)보다 적극적인 비어 긱스들은 마시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홈브루잉(가양조)까지 진출한다. 맥주를 내 손으로 집에서! 비어 긱스라면 확실히 한 번쯤 시도해 봄직한 '로망'이다. 로망에서 그치지 않고 실현할 생각이 있다면 맥주만들기동호회(아래 맥만동)에 발을 들여야 한다.
홈브루잉의 거의 대부분의 길은 그 곳으로 통한다. 회원 수가 2만 2천 명에 달하는 전국 최대 홈브루잉 커뮤니티인 맥만동은 지역별로 체계적 조직이 갖춰 있어 다달이 모임을 한다. 출품 대회, 공동 양조 콘퍼런스 등 전국 차원에서의 연간 이벤트 또한 활발하다. 초보자를 위한 교육도 정기적으로 진행되며 상업 맥주 시음기와 펍 탐방기부터 시작해 본인의 맥주 작업기와 제조법을 공유한다. 몇몇 고수는 맥주를 넘어 장비까지 손수 만들어 올린다. 이게 과연 취미인지 업(業)인지, 그야말로 후덜덜하다.
이렇게 말하니 어쩐지 너무 어려워 보이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홈 브루잉 역시 초,중,고급 단계가 있고, 사실 고수들의 거창한 설비까진 필요 없다. 초급자들은 '원액 캔 키트'와 간단한 필수 장비 몇 가지만 준비한다면 단 30분 안에 원하는 맥주를 만들 수 있다.
*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