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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메르스 대책회의중인 박근혜 대통령
 3일, 메르스 대책회의중인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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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0분경 옛 소련(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핵반응로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현장 사망자는 2명에 불과했으나 사고 수습을 위해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 29명과 600여 명의 헬기 조종사들이 수개월 뒤부터 사망하거나 후유증에 시달렸다.

사고 당일 오전부터 인근 프리피야트 시에 사는 주민 5만여 명이 체르노빌에서 130킬로미터 떨어진 키예프 시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방사선 오염이 심한 지역에서 40여만 명이 고향을 등졌다. 현재도 500만여 명의 주민들이 방사선 오염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영구 출입 제한 지역으로 지정된 땅만도 서울 면적의 12배에 달한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는 연구원들의 사소한 판단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뇌 과학자 이안 로버트슨 트리니티칼리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승자의 뇌>에서 그 이유를 '침묵 효과(mum effect)'로 설명한다.

당시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는 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핵반응로 가동을 멈춘 후 40여 분 간 공회전하는 터빈 발전기의 전력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버트슨 교수에 따르면 실험을 최초로 주도한 댜틀로프 팀의 연구원들에게는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몇 가지 조치들, 가령 실험 진행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지시킨 자동제어 시스템을 다시 가동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연구원들은 그런 조치를 취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침묵 효과 때문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방하려고 어떤 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는데 굳이 애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보고를 안 한 것일까 못 한 것일까

침묵 효과는 권력이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국가나 조직에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한다. 로버트슨 교수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헤이르트 호프스테드가 고안한 '권력-간격 지수'(각각의 사회계층에 권력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지를 측정하는 척도)라는 개념을 빌려온다.

권력-간격 지수가 높은 국가에서는 서열이 높은 사람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는 반면에 서열이 낮은 사람은 권력을 거의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시 된다. 문제는 권력을 박탈당한 상태에 있는 낮은 서열의 사람들이 조직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윗사람에게 알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최고 권력자가, 문제의 책임자가 아니라 문제를 전한 사람을 화풀이 차원에서 처벌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 긴급현안질의 자리에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출석했다. 그 자리에서 문 장관은 메르스 사태와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에게 최초 보고한 시점과 장소가 지난달 26일 국무회의 자리에서였다고 밝혔다. 지난달 20일 메르스 확진 환자가 처음 발생한 지 1주일만이었다.

문 장관은 "대통령을 찾아가 보고한 적이 없는가"라는 새정치민주연합(새정치) 이목희 의원의 물음에 "유선상으로 통화하면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유선보고는 했으나 대면보고는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메르스 사태를 엄중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메르스 오판론이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문 장관이 최초로 대면보고했다는 국무회의는 화요일마다 정례적으로 모이는 자리라고 한다. 메르스만을 위한 별도의 대면보고 자리로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두 번째 대면보고였다는 지난 3일 대통령 주재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 역시 영상회의로 진행되었다. 직접적인 대면보고와 거리가 멀다. 결국 메르스가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도 박 대통령에게 직접 대면보고를 한 적이 없었던 셈이다. 청와대 참모들은 보고를 안 한 것일까 못 한 것일까.

박 대통령의 평소 업무스타일이 대면보고를 꺼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대통령 앞에서 장관들이 '일부러' 대면보고를 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이번 메르스 사태 와중에 문 장관이 보고를 회피하거나 축소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다. 최초 메르스 확진 환자가 나온 이후에도 박 대통령에게 서면보고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문 장관의 태도를 '침묵 효과'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문 장관이 '정식' 보고를 하기에는 아직 메르스 사태가 본격화한 단계가 아니었다. 문 장관 입장에서 볼 때 사태를 '심각하게' 해석해 보고함으로써 박 대통령에게 '찍힐' 이유가 없었겠다는 말이다. 메르스 사태의 주무부처 수장이자 관리 책임자로서 문책을 염려했을 수도 있다. 문 장관은 침묵 효과의 자장권 안에 있지 않았을까.

박근혜 대통령 어려워 하는 청와대 참모들?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다. 이런 시스템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인지 박 대통령은 제왕적 권위에 가까운 인사·통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토론 대신 '받아쓰기'만 하는 국무회의 광경이 단적인 상징이다. 크고 작은 사안에 '깨알 지시'를 내리고,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권력-간격 지수가 높은 시스템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참모들이 침묵하면서 청와대 보고 라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비단 문 장관만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난 7일 박 대통령은 이병기 비서실장 등 참모진과 20~30차례 전화통화를 하면서 메르스 환자 경유 병원의 실명 공개 등과 관련한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고 한다. '준전시'라는 말이 오갈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 '면전에서' 메르스 사태를 자세하게 보고한 관련 참모는 없었던 것이다.

<한겨레> 6월 8일자 기사,'청와대 이번에도..."우린 컨트롤타워 아니다"'에 따르면 새누리당 수도권의 한 중진의원마저 "대통령이 매일 회의를 열어 현황을 보고받고 지시하고 점검해야 하는데, 여전히 대면보고조차 꺼리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모들이 대통령을 얼마나 어려워하는지를 말해주는 방증이리라.

'보고체계'의 부실화는 메르스 컨트롤타워 문제로도 비화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8일 브리핑에서 "어디가 (메르스 대응의) 컨트롤타워인가"라는 질문에 "국무총리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컨트롤타워와 관련하여 국무총리 위에 대통령이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대통령을 쏙 뺀 결론으로 대답한 것이다.

참모들의 침묵 효과에 따른 결과는 권력자의 안이한 현실 인식과 이에 따른 중대 판단의 오류, 사태 악화 등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였다. 사고 7시간 만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은 박 대통령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참모들로부터 참사 개요나 침몰에 따른 사고 진행 상황을 자세히 보고받았더라면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침묵 내각', '받아쓰기 내각'은 지나친 표현일까

이번 메르스 사태 국면에서도 비슷한 모습들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 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20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메르스 환자가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15명의 환자가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오류였다. 언론에서는 이미 3시간 전부터 확진환자가 18명이라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박 대통령이 메르스 환자 격리와 치료를 위한 국가지정 격리병상 중 하나인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한 건 지난 5일 오후였다. 5월 20일 메르스 확진 환자가 처음 발생한 이후 17일 만이었다. 정부가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한 병원 6곳과, 이들 환자가 경유한 병원 18곳 등 전국 24개 병원 이름을 공개한 건 지난 7일이었다. 메르스 발생 19일 만이었다. 뒷북 대응이라는 비난이 나오면서 박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15일 현재 메르스로 사망한 환자 수는 16명이다. 격리조치 대상자는 하루 하루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 나라 최고권부의 보고-소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더라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영국의 블레어 전 총리는 재임 중 소규모 관료 회의체인 '소파 내각'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한 것으로 유명했다. 블레어 정부의 장관 중 하나였던 크레어 쇼트는 한 인터뷰에서 블레어 내각의 국무회의를 '수다를 떠는 자리'와 다름 없었다고 평가했다. 수다의 주인공이 총리였음은 물론이다.

박근혜 정부의 국무회의를 '침묵 내각'이나 '받아쓰기 내각'에 빗대면 지나칠까. 나름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대통령만 바라보며 펜을 굴리는 국무위원들의 모습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믿음을 주지 못하는 정부 아래서나마 살아보겠다며 마스크 하나에 의지하는 국민들보다야 덜하겠지만. 박 대통령과 장관들이 국무회의에서 차라리 '수다'라도 떨었으면 좋겠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메르스 사태#박근혜 대통령#침묵 효과#권력-간격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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