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음에 크면 경호원이 되고 싶다던 한 소년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다른 건 몰라도 체육부장 자리 만큼은 확고하게 지키던 소년은, 언젠부터 멈춘 뒤 더 자라지 않는 키 때문에 사회체육학과에 진학을 한다.
꿈과는 조금 멀어졌지만 역시 체육이니, 즐겁게 학창생활을 해 나가던 중 교회 성가대 지휘자의 귀에 들어, 3개월간 강도 높은 레슨을 받고 한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된다. 이렇게 큰 폭으로 진로 변경을 하기에는 많이 늦은 나이일 수도 있었다.
뒤늦게 전혀 다른 분야에 뛰어들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난 5월 31일, 이 남자는 지구 최남단 호주의 울릉공 예술대회 (Wollongong Eisteddfod) 성악부문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다. 바리톤 홍성선씨가 바로 그다.
시드니, 뉴카슬에 이어 뉴사우스웨일즈(New South Wales) 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울릉공(원주민어로 '바다의 소리', '큰 물고기의 향연'이라는 뜻)시에 위치한 울릉공 콘서바트리움에서 지난달 30일과 31일, 이틀에 걸쳐 울릉공 예술대회가 열렸다. 이 예술대회는 올해로 120주년이 된 유서 깊은 행사다. 치열한 예선을 거쳐 올라온 참가자들은 보컬, 댄스, 악기연주 그리고 합창 등 각 분야에서 접전을 벌였다.
성악 부문은 30여 명 중에 다시 추려 9명이 본선에 올랐는데 홍성선 바리톤은 '가면 무도회' 중 레나톤의 아리아 eritu, 그리고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의 죽음의 도시(독일어: Dietote Stadt)에 나오는 디토테스타우트를 불러 상금 8000달러가 주어지는 1위로 입상했다. 시드니에 거주하는 박순기, 최찬양씨도 함께 본선에 진출했는데, 홍 바리톤에 이어 2 위는 Mathew Reardon이 그리고 Joelene Griffith가 3위에 올랐다.
빅토리아 스테이트 오페라(Victoria State Opera) 단원을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인 홍성선 바리통은 호주 국립 오페라단 멜버른 공연 때 객원 싱어로 출연한 것을 비롯해 각종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또 MIP 컴퍼니를 설립해 음악을 사랑하는 예술인들을 모아 다문화 이웃들에게 음악을 나누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원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호주에 와서 자리 잡는 동안 이런저런 마음 고생을 해서 그런지, 이제 비로소 신앙이 생긴것 같다."
홍 바리톤은 음악을 통해 자연스러운 선교 활동도 할 생각이다. 어린시절부터 스포츠맨이 될 거라 생각하고, 또 꾸준히 그 길로 오다가 마치 드라마처럼 한순간에 진로가 바뀌었던 것처럼, 그의 호주 정착 역시 파란만장했다.
넉넉하지 않은 처지였으나 밖으로 나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그는 대학교 졸업식이 끝난 지 6일만에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단돈 200달러를 들고 퀸슬랜드 선샤인 코스트(Sunshine Coast)에서 영어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시드니로 옮겨 UTS 대학에 진학했다.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그때 비로소 영주권을 취득하면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2006년 말, 멜버른으로 옮겨 메드리안 인터네셔널 호텔 학교에서 요리를 배우는 학생으로 또 한 번 변신했다.
음악으로 영주권 따기는 어렵지만, 요리 과정을 마치면 용이하다는 정보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에 유리한 다른 과목들도 있었으나, 아버지 영향으로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선택하는 데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즈음이 바로 홍 바리톤이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아니, 살아냈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으로 달려가 저녁 시간에 맞춰 일을 했다.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과 돈을 벌어야 하는 것, 그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4~5시간만 일해서는 생활비와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밤에 할 수 있는 청소일을 하다 더 시작했다.
아주 가끔, 한인사회에서 열리는 행사에 나가 노래를 부르며 그나마 자신의 최종 꿈인 음악을 놓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곳으로 온 걸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음악으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별의별 회의가 다 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아마 절대 못할 것 같지만, 글쎄요. 그때는 그렇게 가끔 밀려드는 두려움 속에서도 잘 버틸 수 있었습니다." 요리 공부를 마치고 영주권을 신청한 그는 2008년, 빅토리아 주 오페라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다시 노래를 시작하다가 영주권이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를 조금 더 하겠다는 생각으로 찾아간 곳에서 홍씨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주권 취득까지의 기간 동안 주어지는 브릿징 비자(Bridging Visa)가 여러 종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받은 것은 처음 왔던 편지와 달리, 영주권 취득시까지 해외 여행도,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담당 직원은 서류 진행을 잘못한 것이 아니냐는 홍씨의 항의에 미안하다고 할 뿐, 다른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만약 이탈리아로 가겠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나가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당시, 서른두 살의 홍씨는 이탈리아로 가서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호주를 떠나버렸다. 이탈리아에서 6개월 공부를 한 후 관광비자로 다시 멜버른으로 돌아온 그는 이민성에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써서 이메일을 보냈고, 기대보다 더 큰 답을 받았다. 이곳에서 공부했던 것 등등이 보탬이 되어 다시 영주권 신청을 하면 된다는 소식이었고, 그후 3일이 지나 그는 이제 돈을 내지 않고도 음악을 배우고, 활동할 수 있는 영주권자, 그리고 이어서 시민권자가 됐다.
그렇게 신분이 안정되어 가니, 음악 활동에도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지난해 야라 오페라(Yarra Opera)의 '토스카' 공연을 통해 솔로 데뷔를 하고, 이어 멜버른 시티 오페라에서 기획한 '일트라 바토레'에서 바리톤 솔로 롤을 맡아 차츰 그 실력을 인정 받아가던 중 드디어 올해 전통의 울릉공 예술대회에서 1등에 등극하는 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음치에 박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성대는 남달랐다. 이번 대회에 출전했을 때 돈을 아낀다며 차에서 잠을 자고 예선에 나가고 또 차에서 하룻밤을 지샌 뒤 본선에 나가 1등을 할 만큼, 그는 지치지 않는 성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박자도 잘 몰라 다른 사람이 한 시간 연습하면 자신은 두 시간을 연습했고, 또 어떨 때에는 반주자에게 부탁해 전곡을 녹음한 뒤 통째로 외우기도 했단다.
음악과 거리가 멀게 지내다가 기초부터 다시 해야 하니 악보를 보는 것에 집중하느라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치, 박치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의 '겸손'일 테고, 사실 강하게 또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의 노래에는 그가 이겨낸 고생과 환한 그의 성품이 잘 어우러져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호주에서 인정을 받아가는 만큼, 외곽에 떨어진 고등학교 등을 찾아가 10주간 음악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섭외가 들어오고 앞으로 공연도 차근차근 스케줄이 잡혀가고 있다.
"부모님이든, 신이든...누군가에게서 이어진 재능을 정말 감사하며 잘 쓰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한인사회 안에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감동과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아이들을 위한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꿈도 있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음악은, 함께 할 때 훨씬 더 아름답고 멋있어지는 것 아닐까요? 이제 또 그 꿈을 향해 열심히 다시 달려 봐야죠."
아직 미혼인 그는, 자신의 꿈을 지지하고 함께 해 주는 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며 그래서 조급해 하지 않겠노라고 너털웃음을 웃는다. 멋진 바리톤의 목소리로, 연일 흐린 멜버른의 겨울 날씨에 따스한 소식을 만들어 준 홍성선 바리톤의 꿈을 응원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6월 19일에 발행되는 주간 멜번저널에 중복 게재 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