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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규모가 많이 확장되긴 했지만, 로마제국 전체로 놓고 보자면 루테시아는 아직 변방의 자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했다. 그런 와중에 3세기 무렵 두 번에 걸친 이방 민족의 침략을 받으며 안 그래도 아담했던 도시는 다시 시테섬 안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율리아누스 동상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율리아누스 동상
ⓒ Musees Nationnaux,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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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 루테시아 역사에 있어 가장 극적인 반전의 순간을 불러온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율리아누스, 로마제국의 마지막 비(非)기독교인 황제이며, 그런 까닭에 훗날 기독교인들에게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인물이다. 먼저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 로마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상을 떠나자,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가족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처참한 살육전 끝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그리고 콘스탄스에 의해 3등분되고 만다. 이 세 명은 모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형제지간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동생 콘스탄스와 영토분쟁을 벌이다 세상을 떠났고, 이어 콘스탄스도 부하 장수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결국 홀로 살아남은 콘스탄티우스 2세는 A.D. 353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Augustus)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A.D. 355년이었다. 콘스탄티우스는 항상 갈리아 지방에 자신의 대리인을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곤 했지만, 그가 부제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치나 군사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스 고전과 철학에 심취해있던 젊은 청년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생각하는 최고의 적임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상황은 황제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동쪽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로마와의 충돌이 잦아졌고, 콘스탄티우스가 수도를 비울 수밖에 없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황제의 신경이 온통 동방으로 쏠린 사이 서쪽 갈리아 지방에서는 이루 걷잡을 수 없는 소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여러 이방 민족의 계속되는 침략에 더해 일부 로마군들이 도적떼로 돌변하며 갈리아 전체에 무질서와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율리아누스는 로마 군대의 사령관이 되어 갈리아로 파견되었다.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수도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과 서쪽 갈리아 지방의 루테시아 사이에는 꽤 먼 거리의 간격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 1세기 초반 로마제국 전도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수도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과 서쪽 갈리아 지방의 루테시아 사이에는 꽤 먼 거리의 간격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 swartzentro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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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율리아누스는 성공적인 행보를 지속해나갔다. 나라 외적으로는 프랑크족, 알레마니족 등을 격퇴하며 국경을 재정비하는 데 성공했고, 내부적으로는 세금개혁을 단행하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전까지 율리아누스가 정치 경험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제대로 된 군대도 지원받지 못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곧 나라는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들은 율리아누스에 환호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고, 그 동시에 환관들이 둘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하며 율리아누스에 대한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황제는 율리아누스의 군대에 대한 제정지원을 중단했고, 얼마 후에는 1만 명의 병사를 선발해 동방으로 보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율리아누스가 거느리고 있었던 병사는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이조차도 대부분 황제에게 정식으로 지원받은 것이 아닌, 본인이 패잔병을 추슬러 결성한 군대였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내세운 명목상의 이유는 페르시아 군대를 무찌를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율리아누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당시 루테시아에 머물고 있었던 율리아누스는 황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지만, 그의 명령에 따라 동방으로 보낼 병사들을 선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율리아누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병사들은 이별연회가 열리던 밤, 율리아누스의 숙소에 침입해 그를 황제(Augustus)로 옹립하고, 이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A.D. 360년, 2월 무렵에 벌어진 일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이에 황제의 칭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이복형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을 비롯해 공식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율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A.D. 300년경부터 이미 'Civitas Parisiorum', 즉 라틴어로 '파리지의 도시'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 도시는 공식적으로 파리(Paris)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파리는 로마제국 변방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명실상부한 서방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편 로마제국의 또 다른 황제이자 율리아누스의 이복형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격분하여 갈리아로 향하는 일체의 물자보급을 중단시키고 율리아누스의 군대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율리아누스도 나름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병력을 총동원해 콘스탄티우스와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가 세상을 뜨는 일이 벌어졌고, 율리아누스는 자연스럽게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A.D. 361년 12월 11일, 그는 뜨거운 환호성을 받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부제가 되며 그곳을 떠난 지 꼭 6년 만이었다. 파리는 다시 로마의 변방이 되었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우선 도시의 이름부터가 바뀌었고, 짧지만 한순간이나마 황제가 거주하는 도시라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이렇게 갈로-로망의 루테시아는 한층 더 로마화된 파리로 탈바꿈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00여 년이 지난 A.D. 481년, 결국 유럽을 휩쓸던 프랑크족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의 조상인 이들은 프랑크 왕국을 건립하였고, 그 첫 번째 왕 클로비스 1세 아래 파리는 왕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로마-파리의 시대는 저물고 프랑크 왕국의 수도로서, 도시 역사의 또 다른 한 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여행의 초점은 한 사회의 역사와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 두었고, 그랬기에 여행기도 비슷한 양상으로 써내려갔지만, 기사가 조금 어렵고 지루하다는 독자 여러분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 기사부터는 여행 중에 벌어진 소소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태그:#여행,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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