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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신경숙씨. 사진은 지난 2009년 6월 25일 세종로 한 레스토랑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 당시 모습.
 소설가 신경숙씨. 사진은 지난 2009년 6월 25일 세종로 한 레스토랑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 당시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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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대표적인 한국 작가로 알려진 신경숙 작가의 오래전 단편 <전설>이 일본 극우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한참이다. 아니 문단의 논란을 넘어서서 '사기 및 업무 방해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초기 당사자의 침묵과 출판사의 안이한 대응은 작가와 독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명 작가의 표절 논란이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공선옥, 공지영 작가의 작품은 종종 읽었지만 주로 여성의 내밀한 자의식을 깊숙이 천착해 온 듯한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내 독서 양식과 맞지 않아서 그동안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그 유명한 <외딴방>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반면 공선옥 작가의 작품은 여성의 핍진한 면면을 나의 청년시절의 삶과 직면하게 해서 읽을 때마다 늘 서늘하고 두려웠다. 공지영의 작품은 대체로 가볍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나 <고등어> 같은 작품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신경숙의 <전설>과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작가의 표절 혐의를 벗어나기는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두 작품을 해당 문단만 따로 떼어놓고서 본다면 표절은 명백하다. 문예지가 아닌, <허핑턴포스트>라는 인터넷 블로그에 공식적으로 표절 문제를 제기한 이응준 작가는 그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표현인​ '기쁨을 아는 몸'에 주목한다.​ 작품속에서 원래의 문장은 '사랑을 아는 기쁨'이지만 ​번역자가 번역 과정에서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랑을 아는 기쁨'과 '기쁨을 아는 몸'은 ​같은 의미이지만 다른 표현이다. 이런 시적인 표현을 번역가와 작가가 동시에, 사실 시간차가 있지만, 생각 하기는 쉽지 않다. 논란이 되는 문단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이런 식의 우연은 로또 일등에 당첨될 확률이거나 혹자의 표현대로 지상에 바늘 하나를 세워놓고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트려 두 바늘의 끝이 만나는 확률 정도일 것이다. 혹자들은 작품 전체가 아닌 일부 문장의 유사성만 보고 표절이라고 말하​는 게 과잉반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정말 '기억의 표절'이었을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모티브'가 생각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시나 소설적 영감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영감을 얻는 것과 문장을 통째로 베끼고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창작물인 것처럼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작가를 믿고 책을 구매하며 무한한 신뢰를 보낸 독자를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표절이 사실이라면 <전설>과 <우국>의 유사점은 계속 발견될 것이다. 실제로 문장이 유사하거나 표절이 짙은 구절이 몇 군데 더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두 작품의 배경이 '전쟁'이라는 것과 주요 등장인물이 '신혼부부'라는 ​공통점도 우연치고는 특별하다. 그래서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우국>을 모른다고 하기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내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난 후 <아리랑>과 <한강>을 독파했듯이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면 필시 그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었을 것이다. 하필 천황제를 찬양하며 할복 자살한 극우민족주의 작가의 극우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라는 것도 작가가 독자들에게 건전한 '비판'이 아닌 맹목적인 '비난'을 사는 이유중 하나다.

사실, 표절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오래전에 논란이 되었던​<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처럼 이인화의 '포스트 모더니즘<혼성모방>'을 빙자한 짜깁기가 대표적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럴 수도 있다. 극이 산으로 갈 상황이 되면 공중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기계 장치)'를 등장시켜 모든 극적 갈등을 일소해 버리던 그리스 시대의 '비극' 이후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을 지도 모른다. 지역 언어에 불과했던 영어를 세계적인 언어로 확장 시켰던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작품들 또한 일부는 그리스 문학에 빚을 지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새로운 것이 없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어서는 안된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낯설게 하기'가 이인화 같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로 가득한 오늘날의 문학 안에서 진정 필요한 이유다. 진짜 작가는 일상생활과 일상 언어의 상투성을 과감히 털어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과 언어들에 마음과 정신이 열려 있어야 한다.

맛보고, 거짓말하고, 사랑하는 <혀>를 주제로 한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당시 해당 언론사의 심사위원이었던 조경란 작가가 같은 제목을 주제로 장편을 출간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2005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인 권지예의 작품집 <꽃게무덤>도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의 에세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중 한 대목을 그의 소설집에 실린 소설<봉인>에 무단으로 도용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도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표절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논란은 더욱 증폭되고 확산되는 추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엄혹했던 시절의 민주화를 위한 대의와 열망으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자조섞인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시의 주제와 분위기 구성.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시간이 지나고 논란이 잦아들면 처음 표절 문제를 제기했던 이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논란의 당사자들은 여전히 문학 안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자신의 논문 <한국근대소설사연구>에 가져다 쓴 김윤식 교수를 고발했던 이명원 평론가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의 문제제기는 정당했지만 내부고발자가 되어 버린 그는 자신의 스승을 배신한 댓가로 그 스승의 또 다른 제자들에 의해서 대학원을 떠나야 했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문단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침묵의 카르텔'의 희생자중 한 명이다.

땅에 묻어야 할 것은 '문단권력'과 '침묵의 카르텔'이다

​더 나아가서 '문단권력'과 '침묵의 카르텔'을 깨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창비, 문학동네, 문지. 그중 창비는 백낙청이란 등식을 깨야 한다는​, 백낙청의 50년 체제를 깨뜨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위에 언급된 출판사 외에도 현대문학과 문학사상도 이 '문단권력'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을 것이다. 특히 '현대문학'은 표절 논란이 되고 있는 작가에게 '현대문학상'을 안겨주었다. 그 수상집에 실린 작품이 표절 의혹을 받고 있는 '전설'이다. 그렇지만 이 사태에서 두 출판사는 교묘하게 비켜가는 듯한 느낌이다.

'문단권력'의 상징이 되어 버린 창비의 백낙청은 우상일까? 처음부터 타락한 우상은 없다. 우상은 현실의 부조리에서 발생하고 긍정에서 출발한다. 한때 구원자로 여겨졌던 우상의 타락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강고해진다. 한번 쌓은 성은 스스로 무너지려 하지 않고 무너뜨리기도 힘들다. 그리고 나는 이 무섭고 무거운 진실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으며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이 세상에 쌀 한톨 내지 못하고 벽돌 한장 얹지 못하는 문학이 주는 진실한 힘이다.

작가의 표절 논란이 오래전부터 작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었다는 사실은 무척 놀랍다. 처음 표절 논란이 일었을 때 작가나 해당 출판사가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했다면, 그로 인해 작가나 출판사에게 다소 상처가 남을지언정 작금의 추잡한 표절 논란은 없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최소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했던 독자들에게 '절필선언'을 강요받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정말 그랬을까?​ 작가는 의도적으로 문제의 작품을 표절했을까? 어디선가 본듯한 문장, 표현, 문체, 그리고 구성.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르는 문장과 표현들. 기억의 표절​. 무의식중의 어떤 기억을 표절하는 행위. 그런 것이었을까?

예전에 '코끼리'와 '냉장고', 그리고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삼단논법'을 주제로 단편을 써서 인터넷 사이트의 문학 공모전에 출품을 한 적이 있다. 그 소설의 분위기가 박민규의 단편 '카스테라'와 비슷하다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코끼리와 냉장고 그리고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삼단논법이라는 소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상투적이고 낯익은 방식이다. 상투성과 낯익음이 '마술적 리얼리즘 형식'의 소설을 통해서 거대한 코끼리를 실제로 냉장고에 넣어 보자는 새로운 방식의 '낯설게 하기'가 시작되는 순간 '상상력'은 내 의식속에서 말의 옷을 입고 세상을 향해 '활자화'되었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온전한 나의 상상력이었는지 혹은 '기억의 표절'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쓴 글이 나의 글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그 글은 바로 나의 글이었다.

문학은 문학의 영역에서 풀어야 한다

이번 표절 사건은 이전의 표절 사건들과는 다르게 문학의 자장을 벗어나 형사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문제를 제기한 이응준 작가도 문단 내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나 시인, 평론가들도 이 문제를 문학의 영역 안에서 해결하자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문학의 오류는 출판사와 작가 양심의 문제이지 형사 소송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문학계 안에서의 자정능력은 이미 오래전에 늦어버린 것이, 상실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작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련된 문학의 언어로 토해낸 그녀의 말들은 '자기 변명'에 가깝고 '한국 작가회의'도 긴급 토론회를 열었지만 이 낯설면서도 오래된 '표절 논란'과 '문단권력'에 관하여 얼마나 실효성 있는 대안이 제시될지는 미지수다.

앞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앞서 표절문제를 제기했던 이들처럼 이응준 작가가 발표 지면을 잃고 문단 안에서 조용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번 표절 논란을 통해서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말처럼 인위적으로 '절필선언'을 하는 것도 자신의 작품을 '항아리'에 묻어 두는 것도 반대다. 열일곱살부터 공단 생활을 하며 현실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작품으로 쓰고 싶어서 시작했을, 그렇지만 어느새 '문단 권력'과 '침묵의 카르텔'의 비호 속에서 우상의 어둠, 문학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렇기에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 견고한 성을 쌓았을 작가가 이제는 과감히 그 성을 무너뜨리고 결코 타락하지 않을 새로운 '성'을 쌓기 바란다.


태그:#신경숙, #전설, #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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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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