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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8일 서울광장을 출발해 을지로 일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8일 서울광장을 출발해 을지로 일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지난 28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제16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1년에 하루, 성소수자들이 사회적 편견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문화를 나누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지난해에는 신촌에서 행사가 마련됐는데, 올해는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규모도 훨씬 커졌다.

주한 대사관의 참여도 더욱 늘어났다. 지난해에 3개국이 참가했던 것에 비해, 올해는 미국과 독일, 벨기에, 프랑스, 영국 등 16개국이 시청 광장에서 부스를 마련하고 행사를 함께 했다. 지난 10일 개막식에서 각국 대사관과 서기관이 모여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이후 다시 모습을 볼 수 있었다(관련기사 : "엄마, 나 게이야" 성소수자 응원한 구글과 리퍼트).

혐오 세력 포위에도 무사히 진행된 퀴어문화제

퍼레이드로부터 1개월 전, 남대문 경찰서 앞에서는 집회 신고를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퍼레이드를 막으려는 단체 때문에 주최 측이 애를 먹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8일 당일에도 광장에는 '동성애 반대'를 부르짖는 보수 종교 단체가 대규모로 모여 들었다.

울타리가 설치되고, 경찰 병력이 동원돼 큰 마찰은 없었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이 축제 현장을 거의 포위하다시피 한 것을 생각하면 행사가 무사히 진행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메인 행사인 퍼레이드도 지난해와 다르게 순조로웠다. 지난해 퍼레이드 행렬 앞을 종교 단체 회원이 계속 끼어들어 드러누웠던, 그래서 5시간 이상 지체된 것을 떠올려보면 원활한 진행이었다.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도 미국대사관 측의 부스를 방문하고,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도 현장을 찾았다. 외국인을 비롯해 많은 인파가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광장에 방문했다. 명동까지 이어진 퍼레이드 행렬도 한국에서 최장 거리로 늘어난 구간이었다.

더구나 미 연방대법원이 동성 결혼이 미 전역에서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린 다음날 행사가 치러져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동성애를 '치료'하라는 말을 뱉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축제를 즐겼다. 그야말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보수 종교 단체가 만든 모순된 풍경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 열리자 이를 반대하는 집회참가자들이 북을 치며 공연을 하고 있다.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 열리자 이를 반대하는 집회참가자들이 북을 치며 공연을 하고 있다. ⓒ 이희훈

SNS에서는 누리꾼들이 연신 행사 현장의 사진을 공유했다. 뜻밖에도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 중 하나는 행사 옆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던 보수 종교 세력의 모습이었다. 어찌나 신나게 공연을 했는지, 어떤 외국인은 지나가면서 "한국 문화로 표현된 퀴어 행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 3월, 리퍼트 미 대사가 피습된 당시 쾌유를 기원한다며 부채춤을 추던 집단도 있었다. 그랬던 단체가 리퍼트 대사가 참여한 퀴어문화축제를 "결사 반대" 한다면서 춤을 추는, 그야말로 모순된 풍경이 펼쳐진 셈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성애 OUT"을 외치는 보수 종교 단체는 이어서 차이콥스키의 곡에 맞추어 발레 공연도 펼쳤다. 고전주의 음악가 중 동성애자로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차이콥스키 노래로 공연을 하면서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기묘한 상황. 또한 종교 단체가 들고 있던 깃발 중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진 것도 있었는데, 이는 마치 덴마크의 국기와 흡사했다. 1989년에 동성 연인 결합을 제도로 인정하고, 2012년에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덴마크 말이다.

이에 한 누리꾼은 "종교 단체의 재능 기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모순을 꼬집기도 했다. 미국인인 리퍼트 대사가 보기에 어땠는지 모르지만, 상식선에서 지켜보기에도 이상한 부분이 많은 보수 단체의 공연이었다. 개인의 정체성을 '반대'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였고,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도 그랬다.

공포에 반응하는 그들의 자기 정당화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2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지난 3월,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당시 춘 부채춤과 지난 28일 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 보였던 북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공연의 주체가 '보수 종교 단체'라는 점 말고도, '공포에 반응한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사가 칼에 찔렸을 때에는 '한미 동맹의 위기'로 인식해 열심히 부채춤을 춘 사람들이, 미국 대사가 지지 의사를 밝힌 퀴어문화축제를 두고서는 '한국이 망한다'며 북을 치며 예배를 한 것이다.

다른 성격의 사안을 두고, 한국이 위기에 처했다고 인식했다는 점은 이해한다고 치자. 그런데 공포를 느낀 상황에서 '전통춤'을 추면서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샤머니즘적 태도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무엇보다도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무조건 '종북'이나 '나쁜(이런 수식어가 어떤 이유로 붙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성애자'로 몰아붙이는 집단이 '종교 단체'나 '보수 세력'을 자처하는 것도 논리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다.

보수 종교 단체가 퀴어문화축제 현장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동성애가 한국을 망친다'는 그들의 논리는 결국 그들이 매번 가지고 나오는'종북'이라는 프레임과 같은 차원이다. 그런 사람들을 모욕하고 반대하는 자신들은 '애국자'라는 생각인 듯하다.

지난해 퀴어 퍼레이드를 막아선 종교인들은 월드컵이 열릴 때나 듣던 "대~한민국!"을 연신 외치기도 했다. 통제 불능의 상황이나 대상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심리에서, 그 범주와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시도하는 자기 정당화까지. 한국의 역사에서 자칭 '보수'가 보여주는 성격을 압축한 것 같은 장면이었다.

이런 저런 방해에도, 올해 퀴어문화축제는 개막식과 행사, 퍼레이드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난해보다 더욱 성대한 퍼레이드가 열렸고, 더운 날씨에도 참가자들이 환하게 웃으며 축제를 즐기는 모습은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는 지난해의 슬로건을 떠올리게 했다. 올해 퀴어문화축제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내가 나일 수 있는 세상"이었다. 이 말은 성소수자들의 성적 지향을 포함해, 성별과 인종 등의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뜻하는 것일 게다.

동성 결혼 법제화 판결이 나온 미국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트위터에 남겼던, "오늘은 평등을 향한 우리의 큰 발걸음입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려본다. 지난 28일 시청에서 명동까지 많은 사람이 함께 한 퍼레이드도, 한국 사회가 평등을 향해 걷는 발걸음이었다고 훗날 기억하게 되리라 믿는다.


#퀴어문화축제#성소수자#퀴어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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