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령·총리령·부령(이하 '시행령')이 제정됐을 경우, 국회가 대통령·총리·장관에게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정치권이 분란을 겪고 있다.

기존 국회법 제98조의 2 제3항에서는 대통령·총리·장관에게 위법 사항을 통보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위법 사항을 통보할 수 있다'에서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로 바뀌었으니, 대통령과 행정부를 한층 더 견제하는 쪽으로 개정안이 마련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개정안이 삼권분립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행정부가 만든 시행령에 국회가 관여하는 것은 행정권에 대한 침해이며, 사법부가 해야 할 위법성 심사를 국회가 하는 것은 사법권에 대한 침해라는 게 거부 사유다. 

하지만 국회가 만든 법률을 구체화시켜야 할 행정부 시행령이 법률을 위반할 경우에, 국회 입장에서는 위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위법한 시행령을 국회가 직접 무효화시키는 게 아니라 수정·변경을 요구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므로,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박 대통령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싼 대한민국의 풍경을 옛날 사람들, 특히 고려시대 사람들이 저세상에서 관전한다면, 어떨까? 아마 그들은 '대한민국 임금은 상당히 권위주의적이다'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성립된 왕명에 대해 신하나 귀족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게 결코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입법·행정·사법 전반에 두루 관여한 옛 군주들
 고려시대 사람들의 모습.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고려시대 사람들의 모습.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옛날 군주들은 권한이나 위상만 놓고 보면 지금의 대통령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지금의 대통령은 행정권을 가짐과 동시에 입법권·사법권의 일부를 갖는다. 대통령은 시행령 제정권을 가지는 등의 방법으로 입법권의 일부를 갖고, 위헌정당해산 제소권이나 사면권을 행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법권의 일부를 갖는다. 하지만 대통령의 주된 권한은 행정권에 있다.

이에 비해, 고대 군주들은 입법·행정·사법의 전반을 책임졌다. 그들은 법률(왕명)을 제정하고 행정부를 통할하는 것 외에도, 법정최고형이 사형인 사건의 최종 재판관 역할을 했다. 임금들은 법률을 검토하고 정부 대신들을 지휘하고 재판서류를 검토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살았다. 

사극에는 임금이 후궁이나 궁녀를 데리고 연못가를 산책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지만, 실제의 임금들은 그럴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것은 그들이 입법·행정·사법 전반에 두루 관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군주들은 지금의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은 권한을 행사했다. 

물론 권한이 많은 것이 곧 권력이 강한 것은 아니다. 옛날 군주들은 오늘날의 대통령처럼 수시로 텔레비전에 나와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이를 무기로 귀족이나 신하들을 압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신하들을 통해서만 백성들과 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옛날 왕들이 더 강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한이란 측면에서 옛날 왕들이 훨씬 더 강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자라는 위상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해 고대의 군주들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위상을 갖고 있었다. 천재지변이 생길 때마다 임금이 비판을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의 대리인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하늘의 변고가 생겼다는 것은 신의 대리인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옛날 군주들은 지금의 통치자에 비해 훨씬 더 신성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권한이나 위상의 측면에서 지금의 대통령을 훨씬 더 능가했지만, 옛날 국가에서는 군주의 왕명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이미 성립된 왕명에 대해 신하나 귀족들이 제동을 걸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인정되었다. 왕명은 신성불가침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왕은 신성해도 왕명은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시대가 고려시대다. 왕명의 일종인 제서(制書)를 둘러싼 군주와 귀족·신하들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면, 왕은 신성해도 왕명은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궁궐을 재현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고려시대 궁궐을 재현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82조에서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라고 규정한 것처럼, 고려시대에도 주상(임금의 정식 명칭)의 왕명은 문서로써 성립됐다. 그리고 왕명은 제서(制書)·조서(詔書)·교서(敎書)·책서(冊書)·선지(宣旨)·왕지(王旨)·수서(手書) 같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이 중에서,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사항을 담는 제서(制書)에는 신하나 귀족들의 견제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이것을 봉박권(封駁權)이라고 했다. 물론 제서 이외의 왕명에 대해서도 어떤 형태로든 신하나 귀족들의 견제가 가해졌지만, 주요 이해관계를 담는 제서에 대해서는 그런 견제가 한층 더 치열하게 가해졌다. 이것이 고려왕조에서 매우 당연했다는 점은 고려 전기의 전성기인 제11대 주상인 문종(재위 1046~1083년) 시대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제5대 문종은 어딘가 문약한 느낌을 풍기지만, 고려 문종은 정반대였다. 고려 문종은 무려 37년간이나 임금 역할을 하면서 고려 사회를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매우 안정된 나라로 만들었다. <고려사> 문종 편(정식 명칭은 문종세가)에 따르면, 고려 후기 대학자인 이제현(1287~1367년)은 "당시 사람들은 이 시대를 태평성대라고 불렀다"며 문종 시대를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안정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이 시대는 왕명을 둘러싼 대립관계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음력으로 문종 9년 10월 12일, 양력으로는 1055년 11월 3일. 이 날 문종은 '제서'라는 강력한 형식으로 불교 사찰 건축에 대한 왕명을 내렸다. <고려사> 문종 편에 따르면, 왕명의 핵심은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행복하게 하고자 하니, 주무 부서에서는 적합한 부지를 골라 사찰을 건립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성립된 왕명이었다. 왕명이 나오기 전에 반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최고 관청인 중서문하성에서 '대통령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중서문하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왕명을 거부했다.

"예로부터 명석한 제왕 중에, 사찰과 불탑을 건립하여 나라를 평화롭게 한 이는 없었습니다. … 급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면 백성들의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이고, 산천의 기맥을 훼손시키면 반드시 재해가 생기고 신과 인간이 다 노여워할 것이니 이는 결코 나라를 평화롭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왕명에 태클? 고려 이전엔 더 쉬웠을 것

 본문에 인용된 <고려사> 기록. 붉은 꺽쇠 왼쪽이 본문과 관련된 부분이다.
본문에 인용된 <고려사> 기록. 붉은 꺽쇠 왼쪽이 본문과 관련된 부분이다. ⓒ <고려사>

중서문하성의 반대 사유는 표면상으로는 백성들의 수고를 덜고 산천의 기맥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종이 불교세력을 등에 업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과 사찰 건립으로 증세가 불가피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진짜 이유였다.

중서문하성은 행정관청이었지만, 기능상으로 따지면 행정부와 의회의 기능을 겸한 곳이었다. 이곳의 고위직 인사들은 귀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귀족의 이해관계에 입각해서 왕명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임금은 귀족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을 중서문하성 고관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쥔 귀족들을 최고 기구에 앉히지 않으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서문하성은 실질적으로 의회 혹은 주요 정당의 지도부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므로 중서문하성이 왕명에 '태클'을 거는 것은 의회가 대통령령의 위법성을 심사하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물론 이 사안의 경우에 문종은 중서문하성의 수정·변경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성립된 왕명에 대해 귀족·신하들이 견제권을 발동한 이 사례는 '왕은 신성해도 왕명은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옛날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왕명에 대한 견제가 당연하게 인식됐기 때문에, 문종은 또 다른 사안에서는 중서문하성의 '수정·변경 요구'를 수용했다. 2년 뒤인 1057년에 문종은 거란족 요나라에 대한 강경 대응을 천명하는 왕명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중서문하성이 이의를 제기하며 완급의 조절을 주문하자, 문종은 기존의 왕명을 수정해서 새로운 왕명을 내놓았다. 이것은 고려 주상들이 한번 내린 왕명을 사수하려고만 하지 않고, 귀족·신하들의 요구에 따라 왕명을 수정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었음을 알려준다.

고려시대와 비교할 때 그 이전에는 귀족의 권력이 훨씬 더 강했다. 고려 이전의 경우에는 역사기록이 불충분해서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옛날로 갈수록 귀족의 권력이 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왕명에 태클을 거는 현상이 고려 이전에는 훨씬 더 심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고려시대보다 왕권이 강해진 조선시대에는 이전보다 약해지기는 했지만 왕명에 대한 합법적 견제가 여전히 용인되었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는 왕명도 얼마든지 수정·변경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형식의 왕명에 대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가 깊은 왕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공식적으로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싼 대한민국의 풍경을 지켜본다면, 그들은 분명히 '대한민국 임금은 좀 권위주의적'이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국회법 개정안#왕명#제서#고려 문종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