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기사 수정 : 30일 낮 12시 45분]멀고, 길고, 무엇보다 지루한 싸움이었다. 결혼의 의미를 '두 남녀의 결합'에서 '두 사람의 결합'으로 바꾸는 데 이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에 대한 법적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1970년대였음을 생각하면, '두 남녀'를 '두 사람'으로 단어 하나 바꾸는 데 반세기가 걸린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저항, 사라진 외침, 기록되지 않은 투쟁을 고려하면, 이 싸움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길 것이다.
1970년 5월,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학생이었던 리차드 베이커와 제임스 맥도넬은 법적인 부부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결혼증명서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한다. 이 커플은 '동성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항소에 항소를 거듭하며 주대법원까지 갔으나, "결혼을 남녀로 한정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베이커와 제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였던 연방대법원도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연방차원의 판결을 내릴 만큼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는 이유로 각하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잠시 실망했을망정, 패배하지는 않았다.
첫 소송을 제기한 지 43년이 되는 2013년 5월, 미네소타주는 정식으로 동성결혼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 뒤인 2015년 6월, 연방대법원은 '결혼을 남녀로 한정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역사적 판결을 내린다.
'몰상식'이 '상식'으로 통했던 지나간 역사
우리는 '역사적'이라는 말을 큰 감동 없이 쓰는 데 익숙해 있다. 일종의 '언어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셈인데, 이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역사적'이라는 말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쉽게 무시되는 인권 정신의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남자만 투표하게 하자'거나, '피부가 희지 않으면 투표 못 하게 하자'고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우선 그 사람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고 볼 것이다. 하지만 불과 지난 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에서 그런 몰상식이 '상식'으로 통용됐었다.
1920년까지 여성의 참정권은 헌법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1950년대까지 시민권이 제한됐으며, 흑인들은 1960년대까지도 유권자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런 야만은 '성별을 이유로 참정권을 제한할 수 없다'고 규정한 1920년 미국 수정헌법 19조가 비준되고, 1952년 이민국적법이 발효되고, 1965년 투표권법이 도입된 후에야 서서히 사라져 갔다. 법과 정치가 인간 해방과 사회 진보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언론은 이번 판결을 '동성결혼 허용'이나 '동성결혼 합헌'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동성결혼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다. '동성결혼 허용'이나 '동성결혼 합헌'은 마치 이제까지 미국이 동성결혼을 금지해 왔거나, 동성결혼을 '위헌'으로 간주해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연방 판결 이전에도 이미 37개 주와 수도 워싱턴(D.C.), 미국령인 괌에서 동성 간의 결혼을 완전히 인정한 상태였다. 이번 판결은 그 외의 지역에서 동성커플의 합법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이들이 '부부'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헌법으로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별과 관계없이 시민권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듯, 민권보호 차원에서 동성 부부의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유권자의 권리를 '남성 투표권'과 '여성 투표권'으로 구분할 이유가 없듯, 결혼 역시 '이성결혼'이나 '동성결혼'이 아닌, 그저 '결혼'인 것이다.
죽음도 막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과 승리'
6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연방 대법원이 5대 4로 동성부부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로 하자, 법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웃고, 울고, 깃발을 흔들며 그 역사적인 날을 기념했다. 그날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원칙 위에 세워졌습니다"는 말로 대국민 연설을 시작했다.
"진보로의 여정은 느린 경우가 많습니다. 헌신적인 시민들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두 걸음 전진하는가 하면, 한 걸음 뒷걸음질 치기도 합니다. 가끔은 오늘 같은 날을 만나기도 하지요. 느리고 꾸준한 노력이 벼락같이 찾아오는 정의로 보상받는 날 말입니다."오바마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갖는 의미를 "모든 미국인이 평등한 법적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고 정리했다. "사람들이 누구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듯, 누구를 사랑하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날 밤, 백악관 건물은 '성소수자 동등권'을 상징하는 무지개색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그날 대법원 계단 앞에서 감동의 눈물을 쏟았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짐 맞나요?"라며 상대를 확인한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축하드려요. 선생님의 리더십이 이 나라를 바꿨습니다." 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짐 오버거펠이라는 중년 남성이다. 그는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20년 넘게 '존 아서'라는 남자와 부부로 함께 지냈다. 이들 주위의 벗들은 '성별을 막론하고 이들만큼 서로 아끼고 헌신하는 관계를 본 일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아서가 근육무력증에 걸려 한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더 늦기 전에 법적 부부가 되기로 한다.
불행히도, 그들이 살던 오하이오 주는 동성 간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메릴랜드 주로 날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고개를 들기도 어려울 만큼 중증이었던 아서는 이날만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그러나 신시내티로 돌아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다른 주에서 한 결혼을 자신의 고향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주위의 격려와 도움, 연대가 있었기에 싸움은 외롭지 않았다. 석 달 후 아서는 사망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망기록에라도 '부부'로서 기록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지닌 상징성... '사회 진보'의 여정 밟아온 미국
언론은 이번 판결이 '여론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2005년까지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은 37%, 반대가 59%에 달했으나, 10년 만에 이 비율은 정확히 반대로 뒤집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여론을 이처럼 급속히 바꿔놓았을까?
흥미롭게도, 40%대 초반에서 정체되어 있던 지지 여론이 급등한 시기는 2009년, 즉 오바마의 집권 시기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 여론이 급변한 건 6년간이라는 더욱 짧은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동성커플에게 동등한 결혼권을 허락해야 한다는 여론은 40%에서 60%로 뛰며 반대 여론을 압도했다.
이런 변화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오바마의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비주류에, 최초의 백인이 아닌 대통령인 그는 진보적 가치와 희망을 체화하고 출범했다. 그는 변화의 염원을 전 국민 의료보험, 부자 증세,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다른 대통령이 엄두도 내지 못할 정책을 끈질기게 추진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온갖 조롱이 쏟아지고 공화당은 방해로 일관했지만, 그는 진보적 정책을 끈질기게 고수했다. 신기하게도, 오바마의 인기와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도 미국사회는 진보적 가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변화했다. '느리고 꾸준한 사회 진보의 여정'이라는 연설은 그의 경험을 투영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와 정반대의 현상을 경험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그들에게 온갖 조롱이 쏟아지고, 인기와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도 한국사회는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 과거로 꾸준히 회귀했다.
물론 대통령 한 명이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바마가 진보적 신념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변화를 몰고 온 것은 국민 자신이었다. 국민이 변화를 원했고,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무명의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이번 동성결혼 판결 역시, 1970년 이후 수많은 사람이 시, 주, 국가를 상대로 끝없이 요구하고 싸워온 결과였다.
미국 교회가 앞서서 끌어낸 '변화'이번 미국 판결에서 주목할 것은, 법과 정치 못지않게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다. 법과 정치가 '느리고 꾸준한 노력에 대해 벼락처럼' 보상을 내린 정의의 도구였다면,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왔을까?
잘 알려졌듯, 미국은 기독교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다. 퓨리서치의 2015년 조사를 보면, 70% 이상의 미국인이 자신을 '기독교도'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국가정책과 사회여론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은 물론이다. 특히 동성결혼처럼 종교적 신념과 결부된 사회 의제일수록 큰 목소리를 내왔다.
기독교는 '모든 이들이 신앞에 평등하다'는 인권정신을 설파하기도 한 반면, 일부는 성차별과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는 교묘한 논리를 개발해 퍼뜨리기도 했다. 예컨대 구약시대에 여성은 '사람 수를 세는 데 넣지도 않았다'거나, 흑인은 아버지 노아를 수치스럽게 해 저주 받은 '함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사회적 차별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민 60%가 동성결혼을 지지하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의 태도 변화 탓이 크다. 예컨대 주류 개신교의 33%만이 동성결혼에 반대하고, 62%가 찬성하며, 가톨릭 신자의 경우 38%가 반대하고 56%가 찬성한 것이다. 복음주의 개신교는 반대가 70%로 여전히 큰 반감을 갖고 있으나, 이들의 비율은 기독교 전체의 찬성 여론을 압도하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교계의 이런 변화는 오래 전부터 감지되었다. 예컨대 미국 루터회는 2009년에 동성애자가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장로교는 2014년에 동성결혼을 인정할 것인지를 놓고 목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표결을 해 '425대 175'라는 압도적 표차로 승인했다. 교회가 연방정부보다 빨리 결혼을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인정한 것이다.
소수 개신교도들이 차별금지법도 막아... 초라한 한국의 현실
우리는 어떤가. 한국 역시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성별, 나이, 인종, 언어, 종교, 사상, 성적 신체조건, 출신 지역,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할 수 없다는 법안을 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2007년, 2010년, 2013년 모두 세 차례의 시도가 있었다.
그때마다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했는데, 이를 주도한 것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였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기독교인 비율이 미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국민은 2013년 당시 60% 가까웠다는 점이다. 소수의 개신교도가 국민 다수가 필요하다고 느낀 개혁의 노력을 수포로 만든 것이다.
이는 미국과 달리 한국 교회가 반개혁적, 반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일부 교인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차별반대법이 통과되면, 목사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해도 처벌받는다'는 식의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유도했다. 차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교회와 입구에 무지개 깃발을 걸고 '신은 당신이 누구라도 사랑하십니다'라고 써놓은 교회 중 어디가 더 '사랑의 종교'에 가까운가.
오늘날 '내가 왕년에 여성, 아시아인, 흑인의 투표권에 반대했었노라'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동성결혼에 반대'가 편견이었음을 깨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동성애자 차별 반대에 반대'를 외쳐온 이들 역시, 이 신념이 별로 자랑스러운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보다 빠른 속도록 깨닫게 될 것이다.